▣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칼바람 속 소백산 정상

영광도서 0 1,920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소백산 정상까지 1.5키로미터 남았을 무렵입니다. 그때 시구 하나 떠올려봅니다. 그럼에도 갈등은 여전합니다. 푹푹 빠지는 눈, 한 번 빠지면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뒤로 나가서 다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대로 앞으로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은 무릎 정도 차니까 좀 힘들어도 걸을 만합니다. 그러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허리까지 빠져들 만큼이라 전진할 수 없습니다. 걸어온 길이 4키로미터, 남은 길이 1키로미터 남짓한 지점이건만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거리로보면 금방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버거운 탓에 짧지만 길게 느껴집니다. 정확한 길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갈등이 생깁니다.

 

 

 

몸이 마음의 말, 달리 말하면 의지는 있으나 몸이 따르지 않는 때가 이런 경우일 겁니다. 어떤 길이 보이면, 희망이 보이면 몸은 마음에 의지하여 힘을 낼 겁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 발 한 발 길을 찾으며 얼마간 가노라니 저만큼 계단이 보입니다. 계단이다, 그 말에 친구의 표정이 살아납니다. 목소리가 힘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게단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거기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다행인 것은 계단이 보이는 한 갈등할 일은 없습니다. 계단이 보이는 한 어쨋든 정상까지는 간다는 결정은 이미 난 것이니까요.  무언가 희망이 보인다면, 없던 힘도 나게 마련이라 걱정을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애써 게단에 이릅니다.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에젠 살았구나 그런 마음까지는 아니라도.

 

 

 

그만큼 정상이 가깝다는 신호기 때문에 친구는 좋아한 것이지만, 나는 그것보다 이젠 길이 확실하다는 안도감, 적어도 깊은 눈구덩이에 빠지지는 않겠다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계단에 올랐지만 여전히 걷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눈이 계단 난간 바로 밑까지 차서, 마치 작은 나무토막들을 죽 세워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까요. 물론 길 아닌 눈구덩이에 비하면 그야말로 양반이었습니다. 계단을 따라 길을 열며, 전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걷다 보니 드디어 앞이 확트인 정상 능선에 도달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드센지 눈이 바닥을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에너지를 보충할 겸, 가져온 음식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눈이 바닥에 없는 만큼 바람이 드센 곳, 어쩌다 돌아난 나무 뒤에 숨어 잠시 쉬었지만 이제는 드센 바람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람을 이기며 전진해야 합니다. 바닥을 보이는 곳이 있는 만큼, 바람이 눈을 몰아 놓은 곳은 통과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1미터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대는 길의 경계를 위해 처놓은 줄을 길 삼아 그 줄을 밟고 걷습니다. 정상까지 600미터 부터는 얼마나 바람이 극성인지 몸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길의 경계 밖으로 몸이 날아갈 만큼 무척이나 드셌습니다. 이전에 여러 번 이 바람길을 걸었으나 그때보다 강도가 훨씬 더했습니다.  얼마나 극정인지 가려는 방향보다 훨씬 오른쪽으로 치우쳐 가야 바람의 힘으로  왼쪽 난간 가까기 걸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실린 눈보라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찍을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바람을 피할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이전엔 중간쯤에 바위가 좀 모여 있는 곳에는 바람이 숨을 고랐으나 이번엔 거기 마저 바람에 샅샅이 침범 당하고 있었습니다. 칼바람이었습니다. 옷을 추스릴 수도 없는데, 허리 부분에 몸이 좀 드러났는지 바람이 그리 침범하여 마치 날카로운 면도칼로 몸을 긁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각자 도생한다 생각하고 정상까지는 그냥 가기로 했습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바람이 몰아가서 길에는 눈이 바닥을 보이기 때문에 바람만 이기면 걷기에 지장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정상, 눈군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상에 있는 비석엔 비로봉이란 글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고대로 덮여서 그냥 잘 다듬은 바위 하나 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정상에서 단양 쪽이 아닌 영주 쪽으로 조금만 내려서면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애써 정상 까지 왔으니 금방 하산하기 아깝습니다. 하여 준비한 음식을 있는 대로 꺼내 영양 보충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선 그런 대로 있을 만 합니다. 아쉽다면 소백산의 그 아름다운 눈의 능선을 감상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눈보라로 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주 쪽으로는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온 길로 되돌아갈 자산이 없다는 친구, 하산길이야 일단 러셀이 되어 있으니 못 갈 리 없지만 삼가리로 하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결정하고 정상에서 내려가기 시작하니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옵니다. 이젠 길이 뚫렸으나 고생 끝입니다.

 

 

 

하산하는 길, 편안한 마음으로 걷습니다. 걱정 없습니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편안한 마음, 안도감으로 풍경을 즐깁니다. 아름답게 핀 상고대를 바라보는 즐거움, 온통 하얀 세상을 누비는 즐거움, 낙원에서 유유히 길을 갑니다. 온통 하얀 눈을 줄기마다 입고 있어서 하얀 기동처럼 서 있는 나무들은 마치 아주 신성한 신전의 기둥들 같습니다. 지금 같으면 다시 한 번 러셀도 할만 하다는 농담으로 하산을 완료합니다. 마음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희망이 보일 때 몸은 마음의 말을 잘 듣습니다. 마음이 확신을 가질 때 몸은 없던 힘도 몰아서 움직여줍니다. 몸이 강한 들 마음이 나약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해진다는 걸, 소백산 산신령이 알려주는 듯합니다.  애쓴 마음 다독이며 하산을 완료하여 뒤돌아보니 눈을 뒤집어쓴 소백산의 풍경이 다시 올라오라 유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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