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5- 곡성, 관객에게 미끼를 던지다, 영화 속의 진정한 미끼는?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파울로 코엘료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영화는 성경 구절, 누가복음 24:37- 39절 말씀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첫 장면은 낚시하는 장면이다. 미끼를 단다? 낚시는 일종의 사기행위다.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척하면서 실상은 낚아채서 자신의 먹이로 삼는 짓이니까. 이를테면 겉보기와 실제의 속내는 다른 셈이다. 그러니까 성경구절로 시작한다고 이 영화를 종교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낚인 셈이다. 성경구절은 낚싯밥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이면에 다른 의미를 감추고 있다. 종교에 주목해서 보기보다는 일제의 잔재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흉흉한 소문과 함께 정체가 모호한 일본인이 등장한다. 그는 조선여자는 역겹다며 조선여자를 비하한다. 이 남자는 왜 거기 있는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를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다, 사람이 아니라 악귀다, 무당이 아니라 악마다라고도 한다. 그런데 도무지 이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는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일본 남자들이 입는 사리마다를 귀저기 차고 다니듯 입고 다닌다. 또한 가끔 벌거벗은 모습으로 누군가의 눈에 띄거나, 꿈에 등장한다.
누구의 의도였든 흉흉한 소문이 돈다. 소문이 자꾸 돌수록 처음엔 긴간민가하다 사실로 믿어지는 게 소문의 속성이다. 흔히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난다는 말이 있듯이. 꿈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한 번 꿈을 꾸면 우연이라지만,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면 사실로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성경구절을 애써 기억하며 화면에 빠져 있는데, 기대처럼 신부와 견습 신부가 등장한다. 게다가 기독교에서 사탄 취급하는 무당들도 등장한다. 선과 악의 대결일까? 아니면 허상들일까? 불신의 시대를 고발하는 것일까? 귀신이 있다느니, 귀신이 돌아다닌다느니 소문이 돈다.
사건이 확산하자 경찰이 투입되지만 제대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기이한 것은 정체 모를 미친 여자가 왔다 갔다 하며 관심을 보인다. 그녀가 경찰 종구에게 돌을 던지며 모욕을 준다. 종구는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종구를 허름한 집 안으로 유도한다. 종구는 그녀를 미친 여자로 취급하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알 수 없는 공포가 마을을 뒤덮는다. 피부염이 발생하고, 미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유행병처럼 퍼지면 기독교식으로는 그건 귀신의 장난이 아니라, 우연한 전염병이거나 버섯을 잘 못 먹어서 미쳤거나, 미친개에게 물려서 미쳐 날뛰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토록 사건이 커졌다면 벌써 전국적인 이유가 되었을 터이고, 그토록 일이 커지도록 기다릴 리도 없을 텐데, 곡성에서만 알려져 있을 뿐, 국지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괴기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찾아든 사람들, 이번엔 용한 무당이 찾아온다. 한국인 무당이다. 사람들은 이 용한 무당이 악귀를 물리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미친 여자는 무당 역시 일본 악귀와 한 편이라고 경계한다. 이 무당이 온갖 푸닥거리로 악귀를 물리치겠다고 한다.
악귀 같은 일본인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그 증거를 카메라에 담는다. 거기 담긴 사람은 끝장이다. 그 증거는 명백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증거들이 사라진다. 어디로 간 것일까? 견습 신부가 악마를 만날 때, 일본 악마를 만날 때, 일본인 악마는 그의 사진을 찍는다. 그가 이번 희생물이다. 그 악마에게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다. 마치 미끼에 딱 걸린 것처럼, 종교인, 전문적인 종교지도자보다 더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그를 미혹한다. 그러니 빠져나오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없어졌던 증거 사진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악귀를 쫓겠다며 파견 나온 한국 무당이 가지고 있었다. 서로 대결을 펼쳐 죽느냐 사느냐 싸움을 벌였던 자칭 수호무당, 그가 그 증거를 감추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미친 여자뿐이었다. 미친 여자가 예수가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이 세 번 울기 전 너도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던 말씀을 읊조린다. 미친 여자, 그녀는 진정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임에도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로 취급한다. 앞에서 경찰 종구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종구에게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공권력의 상징인 종구는 그녀를 미친 여자로 취급하고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진실을 믿지 않았다. 정말 진실한 사람,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그는 무시했다. 투지는 있으나, 분노는 있으나,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어떤 것이 진정한 자신의 편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우왕좌왕하면 희생자만 늘려갈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공권력의 무능이다.
이 영화는 여러 코드를 슬쩍 감추고 있다. 영화가 말하려는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낚싯밥처럼 피상적인 장면을 보여주면서 교묘하게 의도를 숨기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이유 하나 하나를 되짚어야 한다.
성경구절을 이용한 이유? 이것은 하나의 미끼다. 종교적인, 또는 무속적인 구실로 하고 싶은 말을 숨긴다. 굳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면, 미혹하는 자들, 이를테면 거짓 예수들의 등장이다. 영화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신부견습생은 악마냐는 물음에 대답대신 자신의 손바닥에 못 자국을 보여준다. 영은 몸이 없다는 예수의 말을 인용한다. 거짓 그리스도는 진짜 그리스도처럼 이적도 행하고, 거짓 증거도 믿을 만하게 보여준다는 기독교의 교의를 슬쩍 보여준다.
신부가 등장하고 신부의 견습생도 등장하지만, 이들도 그 사건의 실체를, 일본인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그만큼 악의 실체는 전문가들의 눈에도 드러나지 않고 교묘하다는 종교적인 의미와 함께 자연스럽게 일제식민지의 악령은 우리 안에 아직 살아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교묘하게 우리 삶에 녹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드러나지 않으니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실재하는 잔재들이다.
그리고 이제 영화 결말 부분에서의 만남,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말 것을 미친 여자는 충고하나 그는 끝내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 바람에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고로 이 비극은 끝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우리 안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일제의 망령들을 어떻게 몰아낼 것인가, 우리 마음에 교묘하게 녹아 있는 그런 망령들을 어떻게 지워갈 수 있을까, 아니 이건 단순히 일제의 망령을 떠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이 뿌려놓은, 그리고 교묘하게 위장한 그 가면들을 어떻게 벗겨낼 것이냐 거기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악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이든 그 무엇이든, 그들은 심어 놓는다. 그 허상들에 사로잡힌 우리는 진실을 외면한다. 그들에게 속고 있다. 피부병도, 살인도, 미친병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우리 안에 곪아 있는 마음의 모습이다. 광분하는 우리의 마음의 모습이며, 증오하고 시기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러한 우리의 불행이 우리 어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한다. 낚시에 걸리는 것은 정해진 물고기가 아니라 아무 것이든 상관없다. 우리 사회의 부정의, 부조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파고든다. 우리 문화와 일본 문화와의 대결이든 일제의 잔재든, 우리 문화의 패배다. 일제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억압당하는 모습이다.
그 일본 악마를 없애겠다고 등장한 무당을 보라. 그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는 분명 한국인이다. 피상적으로는 일본인을 물리치려는 존재임엔 틀림없다. 누구보다 일본 악마를 더 증오한다. 애국자인 양 행동한다. 온몸을 바쳐 피를 묻히며 온힘을 쏟는다. 그가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며 일본 악마와 대결을 벌인다. 우리 무당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줄 것이니 안심해도 될까? 그런데 그가, 겉으로는 마을의 수호 무당인 것 같은 그가 속에는 일본식 사리마다를 입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용한 무당, 그는 누구를 상징하는가? 선동하고, 외치고, 애국자인 양 하지만, 속으로는 일본의 잔재를 보호하는 이의 상징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듯 선동하는 정치인의 표상이다. 겉엔 한국인의 옷을 입고 속에는 일본식 사리마다를 입은 정치인을 무당이 대신한다.
일본인은 일본인으로 기득권을 갖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그 증거를 카메라에 담는다. 거기 담긴 사람은 끝장이다. 견습신부가 일본 악마를 만날 때 악마는 그의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 사진에 찍힌 그는 여지없이 희생당한다. 그 악마에게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다. 마치 미끼에 딱 걸린 것처럼, 종교인, 전문적인 종교지도자보다 더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그를 미혹한다. 그러니 빠져나오기는 불가능하다. 살해당하기 전에 찍힌 사진들, 증거는 명백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증거들이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없어진 증거 사진들, 그것이 한국 무당에게 있었다. 일본 악귀와 대결을 펼쳐 죽느냐 사느냐 싸움을 벌였던 한국의 자칭 수호무당, 그가 그 증거를 감추고 있었다.
악마보다 더 무서운 게 사이비 종교지도자이듯, 적보다 더 치사하고 무서운 적은 같은 편이면서, 같은 편으로 우리를 대변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뒷거래를 하는 존재들이다. 치사하고 더럽고 가증스런 악마들이다. 일본인은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 두려움의 대상을 앞에서 막아주는 척하는 무당, 그는 우리 편에서 싸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우리에겐 독버섯보다 더 표독스러운 악마이다.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며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마 중의 악마이다. 겉으로는 다른 옷을 입었으나 속에는 같은 옷을 입은 일본 악귀와 한국무당 때문에, 우리는 우리 끼리 편을 나누어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런 우리를 위해 진정으로 눈물 흘리며, 안타깝게 바라보는 진정한 우리 편 여자를 우리는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무시한다. 같은 편인 유태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게 못 박힌 예수처럼, 미쳤다고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그녀는 눈물로 호소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진실을 보지 못한다. 증거만을 요구한다. 실제로 증거, 가짜 증거는 진실하지 않은 자들이 더 잘 갖추어 보여준다. 손바닥에 못 자국, 그것은 그저 진짜 못 자국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론 들 못 만들랴. 그들은 살아 있는 듯하나 우리 속에 허상이나 주입하는 악령들이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는 미친 여자다.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 선동으로 시끄러운 시대, 우리 사이를 교묘히 파고들어 우리 편인 양 미혹하는 자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진실한 자들이 미친 자란 비웃음을 들으며 곡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사는 곳은 그래서 곡성이다. 곡이 멈추어지지 않는 곡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