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9- 동주, 시를 쓰기 위해 아픈 시대에 태어난 동주를 만나다
동주, 좀 답답했다. 송몽규, 남자다워 좋았다. 나는 동주만 기억했다.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 중에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좀 실망스러웠다. 마치 내가 나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싫었다. 그 시대에 내가 태어났더라면 나는 동주만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동주처럼 소극적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내가 저 시대에 살았다면, 이렇게 상황을 가정하기, 이 것이 내가 상대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영화 동주를 보면서 그랬다. 그렇게 동주를 이해하려 했다. 그럼에도 동주의 말고 동주의 행동들이 답답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동주냐 몽규냐라고 묻는다면 동주가 아니라 몽규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독이 동주하고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의도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인 즉, 몸규는 관객이 예상하는 대로 살다 그렇게 간다는 것이고, 동주는 답답한 대로 살다가 답답하게 죽겠다 싶었는데, 답답하게 살다가 마지막엔 예상과 달리 회심해서 죽는다. 때문에 그는 주인공이다. 입체적인 인물이니까.
"교회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신앙이 왜 그리 중요하냐? 온 세계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외치는 송몽규,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 이론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모두가 차별 없이 사는 사회, 그 이상을 실현할 수만 있다면 멋진 사상이다. 그 목표는 숭고하다. 그 목표로 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를 수단과 방법을 아무렇게나 정하기 때문에 문제일 뿐이다. 목표를 위해 과정은 무시되는 그런 방식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 목표가 숭고하면 과정 또한 숭고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그렇지 못했다. 같은 민족을 찔러 죽이는 사회주의라면 그건 온당하지 못하다. 이상만 훌륭하다고 모든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니까. 몽규는 그걸 깨닫는다. 하ㅣ여 몸규는 사회주의를 버린다. 그 점에 있어서 몽규는 누구보다 사리판단을 잘한다. 정의를 위한 민족주의자이지 그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끝까지 굴하지 않는 진정한 지식인이자 운동가다. 그가 실존인물이라면, 영화에서 보여준 대로의 그의 모습이 진실이라면 그는 재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동주보다 더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라고.
송몽규, 그는 희망이 사라진 절망의 시대에도 조국해방의 희망을 걸고, 그 일에 보탬이 디기 위해 실천하고 행동한다. 그는 동주보다 용기가 있다. 동주는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그는 자기가 품은 뜻대로 행동한다. 그걸 실천한다. 동주도 몽규도 글을 쓴다. 동주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하나 몽규는 신춘문예에 어렵지 않게 당선되어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다. 실천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몽규라면, 동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시대를 산다.
정지용 선생이 동주에게 일본 유학을 권하며 말한다.
“창씨개명을 반대하지 못하고, 아무 말 못하고 술만 마시는 내가 부끄럽다. 유학가라고 권하는 내가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들겠니. 부끄러운 걸 알면 부끄러운 게 아냐. 부끄러운 걸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
동주는 마음의 변절자는 아니었다. 단지 예수가 베드로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동주는 마음으론 일제에 저항했으나 몸으로는 그리 못했을 뿐이다. 그는 정지용 선생의 말을 따라 일본으로 간다. 일본군이 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세상을 움직이는 건 개개인의 내면에 깊이 있는 힘, 그 힘을 끌어내는 것이 문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일본으로 간다. 반면 송몽규는 남의 땅 일본에 온 건 오직 투쟁을 위해서다.
"나는 총을 들게 넌 계속 시를 써."
"왜 나를 자꾸 도망치게 만드니."
송몽규는 감옥에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약을 투여당하고 죽고, 동주는 마지막을 감옥에서 죽는다. 동주는 그제야 자랑스럽게 자기를 발견하고, 그답게, 대한의 아들답게 저항하다 죽어간다.
"부끄럽습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다는 게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러니 서명 못하겠습니다."
동주는 몽규가 ‘관념과 이념에 사로잡혀 문학작품을 단정 짓는다.’고 생각했다. ‘시는 마음속에 살아 있는 힘을 모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학을 도구로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는 동주의 말도 맞다. 그게 진정한 문학이랄 수도 있으니까. 이처럼 동주는 시대를 순수한 문학인으로 살았다. 저항시인이라기보다 다만 그는 시를 사랑하고, 시를 쓰는 것으로 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한 건 내가 동주에 걸은 기대 때문이다. 저항시인으로 기억하는 윤동주, 멋지게 행동하고, 멋지게 일제에 반항하는 모습을 기대한 내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동주는 그러지 못했다. 몽규는 당당하게 일제에 항거하고 저항하는 운동을 하며, 시원시원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동주는 늘 소극적이었다.
그랬다. 그러나 동주는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타오르는 불꽃처럼 마지막에 본의를 보이며 옥중의 이슬로 사라졌다. 머나 먼 이국, 그토록 미운 일본의 한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전까지 그는 세상을 피하며 살았다. 그는 결과적으로 창씨개명을 했고, 일본에서 학문을 익혔다. 그 당시 다른 이들이 누리지 못한 혜택을 누렸다. 늦긴 했지만 동주는 부끄럽지 않은 생을 마쳤다. 시대의 비극이었다.
동주가 그런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훌륭한 시를 더 많이 썼을까? 아니면 시대가 그에게 그런 아픈 시, 멋진 시를 쓰게 한 것일까? 어떤 시대이든 나름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 역할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고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한 데 어울려 시대를 이루고, 역사로 기록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마치 영화처럼. 그런 가정으로 본다면 동주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역할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약하다 약하다 나는 부끄럽게 약하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드디어 터진 불꽃같은 용기로 마지막으로 그의 내면 다운 모습을 보이고 떠났으니, 그는 나름 인생을 잘 산 것이다.
이 영화는 동주의 삶을 아프게 또는 아리게 들여다보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황에 맞는 시를 읽는 감동으로도 멋진 영화다. 행동으로는 그 시대에 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시로는 시대를 노래하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자신의 아린 마음을 노래한 동주의 시를 읽는 것으로도 그의 마음과 동행할 수 있다.
‘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산모통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여진’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때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경,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후 읊는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쉽게 쓰여진 시]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最初)의 악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아침엔 봄비가 촉촉하니 대지에 젖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