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32- 위플래시, 이제는 없어져야 할 스승 상을 보여주는 씁쓸한 영화
위플래쉬는 채찍질이란 의미다. 영화 제목 치곤 좀 특이하다. 내용에 들어가 보면 제목이 딱 맞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채찍질이다. 이해가 안 될 만큼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앤 음악영화쯤으로 생각했다. 보고 난 후엔 음악영화라기보다는 교육영화라 생각했다. 어떻게 학생을 지도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그런 교육영화.
학생을 지도하는 건 단순히 공부뿐이 아니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교육을 시키느냐가 성적의 바로미터라면, 운동 역시 어떻게 훈련시키느냐가 경기력의 바로미터란 점에서 대부분 유사하다. 때문에 선생은 학생을 다그쳐 학생의 성적향상을 유도하고 싶고, 감독이나 코치는 선수를 다그쳐 실력향상을 유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게 제일 빠르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이란 말이 있듯이 공부든 운동이든 연주든 때로는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다그치고 압박하고 때리는 게 가장 빠리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교육법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검토해 봐야 한다. 분명 일시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스파르타식 교육이 제격이긴하다. 하지만 그건 거기까지다. 훈련에 의한 교육이란 자동식 기계처럼 작동할 뿐이다.
이 영화의 제목 <위플레시>는 그들이 연주하려는 곡의 제목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주제로 깔린 채찍질이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앤드류는 최고 연주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음대에 입학한다. 그가 음대에 입학하여 만난 플래처는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교수다. 플래처는 음대 신입생 앤드류의 재능을 알아보았거나 오기나 의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를 점찍은 플래처는 그에게 그야말로 끔찍한 스파르타 식 교육을 시킨다.
플래처 교수의 교육법은 대략 이렇다.
1. 학생의 처지나 상황을 까발려 모욕을 주어 자존심을 긁어서 오기를 불러일으킨다.
2.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채찍질을 하듯이 말이다.
3. 학생의 오기를 키워주기 위해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으며, 치욕을 안겨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4. 점찍은 학생의 실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서는 경쟁관계를 만들어 준다.
5. 경쟁관계는 피상적이고 실제는 그들은 희생양이다.
플래처 교수의 점 찍힌 앤드류는 이 방식을 그대로 적용받는다. 마치 한계를 실험하는 것 같다. 때문에 앤드류는 그렇게 바라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과감히 정리한다. 대신 그는 플래처 교수가 원하는 대로 연습벌레가 된다. 광기어린 연습으로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신입생임에도 그렇게 피나는 연습으로 후보 꼬리를 떼고 연주자의 자리를 꿰차려 한다. 거기까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이런 저런 일로 꼬인다. 그 선생에 그 제다다. 그는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리면서 연주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런 무모한 대시를 하는 학생 앤드류나 매번 무모한 일을 시키는 플래처는 닮았다. 닮았으니까 부대낀다.
그럼에도 플래처는 최고의 실력자다. 때문에 선생을 믿고 앤드류는 어떤 수모든, 어떤 고통이든 참아낸다. 그래야 최고 연주자가 될 수 있으니까. 최고 실력 있는 연주자, 그 기회를 얻으려면, 최후의 학생으로 남으려면 어떤 고통이든 어떤 요구든 어떤 수모든 참아야 하니까.
그런데 플래처가 운다. 플래처가 음악을 들려주더니 플래처가 눈물을 흘린다. 자기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여 발견한 학생을 키웠단다. 그 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단다. 그 학생의 연주를 들려주는 플래처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고인다. 냉혈한이라고 믿었던 플래처가 제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연주곡을 들려주며 눈물을 흘린다. 저런 지독한 악마 같은 교수도 눈물이 있고 감정이 있었구나, 학생들 모두 숙연하다. 그러니 더한 신뢰를 느낀다. 그렇다면 그토록 학생을 다그치는 건, 채찍질을 해대는 건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매다. 그래 따라야 한다. 따르다보면 위대한 연주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연주회 날 가깝지도 않은 장소에서의 연주회, 빠듯한 시간을 주고 어떻게든 그 시간에 연주 준비를 하여 연주할 것을 주문한다. 하필이면 일이 꼬인다. 앤드류는 그곳에 가는 교통정보를 소홀히 했다가 막상 출발해 보니 여간 복잡하다. 시간이 빠듯하다. 결국 기다리는 택시가 오지 않으니 렌터카로 연주장으로 달린다. 너무 서두르다, 게다가 독촉 전화를 받으면서 달리다 그만 교통사고다. 차가 뒤집어지는 교통사고, 그럼에도 피투성이인 채로 냅다 달린다. 꼬이다 보면 또 꼬이게 마련이다. 드럼을 치는 도구를 안 가져 온 것, 그렇게 서두르다 보니 연주회를 망치고, 모든 게 엉망이다.
온갖 치욕을 이기면서 최고 연주자를 꿈꾸던 앤드류도 결국 한계에 도달한다. 인내심의 한계다. 연습의 한계가 아니라 악마처럼 다그치는 교수의 몰아붙임을 그는 더는 참아내지 못한다. 한계에 달한 것이다. 대단한 연주장에서의 폭발로 앤드류는 플래처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그 일로 앤드류는 그토록 꿈꾸던 연주자의 길을 포기해야 한다. 학생 자격마저 박탈당한다. 그가 그렇게 학교를 나오고 보니 인권단체에서 그를 접견한다. 플래처 교수의 강압적인 교수법으로 피해를 보는 학생들을 더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증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플래처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학생도 알고 보니 플래처 교수의 강압적인 교육에 스트레스를 앓다가 집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것이다.
앤드류가 증언을 했든 안 했든 플래처도 학교을 나와야 했다. 이제 앤드류의 최고연주자의 꿈은 멀리 갔다. 그제야 앤드류는 여자 친구를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최고연주자가 되겠다며 절연을 선언할 때 마음 아파하던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이대로 영화가 끝날 리는 없다. 우연히 플래처 교수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다는 정보를 본 것이다. 그는 궁금증이 발동하여 교수가 출연한 카페에 간다. 플래처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를 지켜보다 돌아서는 그를 부르는 플래처, 서로간의 어색한 만남, 그리고는 플래처는 그에게 그가 지휘할 재즈페스티벌에 출연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한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이미 연주장에 가 있다. 최고의 연주자를 꿈꿨던 그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까. 더구나 이제까지 그가 완전히 암기한 곡을 연주한다니까 어려울 것이라곤 없다.
연주회 날 폼을 재고 간 앤드류,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플래처 교수의 치졸한 복수법이라니. 선정한 첫 곡은 그가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곡이다. 게다가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다. 오기가 발동한 앤드류는 그를 밀어내고 연주자 자리에 앉는다. 연주를 망치는 건 당연하다. 연주를 망친 그에게 다가와 플래처가 하는 말, “네가 나를 고자질하였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둘의 기 싸움이다. 그대로 물러날 앤드류가 아니다.
복수 2라운드, 앤드류 자신이 준비한 음악을 연주해댄다. 멍하니 있던 단원들도 그의 연주에 맞추어 연주를 시작한다. 질 수야 없지, 플래처도 지휘를 시작한다. 그걸로 한 곡이 끝나지만 이어서 앤드류는 계속 드럼을 두드린다. 치열하게, 아니 미쳐서 두드린다. 모두가 숨을 죽인다. 누가 이 기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둘 다 미쳤다. 스파르타 교육을 최고로 아는 플래처도 미쳤고, 앤드류도 미쳤다. 광기와 광기의 버티기, 최후의 승자는 없었다. 영화의 끝이다. 결국 최후의 승자, 그건 둘의 광기다.
자신의 광기를 발견하고 그 광기를 사람은 천재가 될 수는 있다. 하여 플래처는 학생의 광기를 끌어내는 게 최고의 교육법으로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의 다그침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다. 그는 그 중에서 한 사람만 키워내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 하나의 천재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주변의 누구이든 희생시켜도 된다는 생각이다. 그의 교육법은 옳을까?
그 오기에 맞선 앤드류, 오기가 앤드류를 망치게 한다. 무엇에든 한계가 있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때로 무리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거기까지다. 한계를 억지로 넘어선들, 다른 사람을 밟고 그 자리를 차지한들, 그건 아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다. 광기, 그건 나를 망치고 남을 망치는 일이다. 이처럼 선생으로서 플래처와 학생으로서 앤드류는 적어도 21세기엔 맞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란 성공만이, 목표를 이루는 것만이 아니니까. 때문에 관객인 나는 사람이 얼마나 미칠 수 있는지, 미치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는 것으로, 자기의 좁은 세계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들로 변한다는 걸 보는 것으로 족하다.
플래처 교수의 광기, 최고연주자의 자리에 앉으려는 앤드류의 아집, 이들의 이기심은 우선 앤드류의 동료들을 무시한 셈이다. 그 피해를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유쾌함보다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얻는다. 세상은 천재들의 것은 아니다. 그들을 위해 다른 사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희생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어떤 사람이든 인격은 모두 소중하니까. 그게 최우선이지 천재 만들기 프로젝트는 전체주의에서나 통하는 일일 터다.
이럴 수는 없었을까? 해피엔딩으로 서로가 기 싸움을 내려놓고, 마지막 곡은 <위플래시>를 아주 신나게 연주하여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두 사람, 미친 제자와 광기의 교수가 멋지게 화해했으면 더 멋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기 싸움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그걸로 끝이다. 감독은 결론의 자신감이 없었거나, 논란의 여지를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플래처의 교수법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자는, 그 결론을 관객의 몫으로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한 명의 천재를 발굴하기 위해선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자신이 없거나, 그런 교수법은 잘못되었다고 선언할 자신이 없었던 듯싶다.
새로운, 이를테면 훈련이 아닌 실전에선 스파르타식으로 교육받은 경우엔 창의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저 기계처럼 유사한 상황에서나 통한다. 그런 교육법이 지금도 유효할까, 이 관점으로는 이 영화는 이 시대엔 맞지 않는 교육법을 미화한 영화다. 물론 감독의 의도가 플래처 선생의 방식을 응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런 교육법은 잘못 되었다는 것인지는 이 영화를 본 이들이 어떻게 보느냐다. 감독은 그걸 염두에 둔, 결말을 명쾌하게 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