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33- 강남, 너무 잔인한 욕망의 계절
욕망,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다. 정의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발현한다면 욕망은 얼마든 긍정적인 힘이다. 그런데 그것이 부정하게 발현되면 그것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가진 흉기로 작동한다. 지나친 욕망은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깨뜨린다. 물리적인 깨트림을 넘어 정신적인 것들까지 무자비하게 파괴시킨다.
자신이 감당 못할 꿈을 이룬 헤밍웨이의 노인이 너무 먼 바다로 나갔다가, 자기 배보다 큰 고기를 잡았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듯이, 트로이인들이 성문보다 큰 목마를 성문을 부수고 끌어들였다가 트로이를 완전히 재로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듯이, 욕망은 궁여지책의 강렬한 도구로, 또는 자기파멸이나 주변을 망치는 재난의 도구다. 배우지 못해서, 배경이 미미한 이들이 당하는 이유, 어쩌면 <강남>은 그걸 보여주려 한 영화일 듯 싶다.
용기와 종대는 함께 거지로 생활하며 누구보다 의리 있게 형제처럼 지낸다. 추우면 용기는 백열전구를 안고 잠든다. 그렇게 추위에 떨며 자고 일어나 서로 장난으로 싸움을 하며 아주 친하게 지낸다. 철거 중인 집에서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며 지낸다. 둘은 주민들이 모두 떠난 빈 집에서 잠들었다가 죽을 뻔한다. 그들이 잠든 집을 인부들이 포클레인으로 집을 부수는 거였다. 놀란 둘은 밖으로 뛰처 나간다.
갈 곳 없는 둘은 조폭들과 인연을 맺는다. 조폭세계에 발을 담근 그들은 이후 끝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동산 붐이 일어나자 정치인들이 정보를 흘리면서 땅 부자로 성장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돈을 바탕으로 장치의 입지를 굳혀가는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조폭이 자리한다. 조폭은 더 큰 권력에 이용당하는 존재들이다.
밥만 빌어먹던 진정한 거지 종대와 용기, 이들은 친형제 이상의 정으로 살아간다. 종대는 땅으로 부자가 되려 하고, 용기는 최고의 주먹이 되려한다. 용기는 비열하게 제 자리를 잡아가려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이 차지하려는 자리에 앉은 사람을 치려고 약삭빠르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려 한다. 당연히 배신과 야비한 농간이 따른다. 반면 종대는 비록 양아치로 살아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는 지키며 산다. 두 사람은 이렇게 목표는 같으나 삶의 방식이 다르다. 둘은 제법 나름의 자리매김을 해나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이들 용기와 종대, 둘이 어린 시절 함께 장난치다 놀다가 하나밖에 없는 전구를 깨뜨린 것처럼 둘의 우정도 의리도 배신으로 깨지고 만다. 좋을 땐 한없이 서로 아끼는 가족처럼 살든 이들이 서로를 잔인하게 배신한다. 서로가 섬기는 게 다른 두 사람, 용기는 종대의 양아버지를 죽인다. 그러자 종대는 양아버지의 복수로 용기를 죽인다. 재물이 우정을 죽인 것일까. 그걸로 종대는 살아남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출신성분이 미천하면 항상 이용당하는 게 삶인지라,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으면, 자칫 후사가 두려울 대상인 종대 역시 이용만 당하고 용도폐기 당할 차례다. 이제껏 뒤를 봐주면서 아끼는 척하던 정치인 서의원, 그 작자는 종대를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때문에 종대는 열차 안에서 총알에 맞고 열차에서 떨어져 터널에서 죽어간다. 아무도 몰래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용대는 터널 안에서 죽어가면서 회상한다. 용기와의 우정 어린 날들을, 그들이 서로 장난으로 싸움을 벌이다, 그만 전구를 밟아 깨뜨리는 바람에 캄캄한 방안으로 변했던 날을.
그를 이용하고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나중에 문제가 될 듯 싶으니까 그를 처리하도록 시킨 서의원은 재선에 성공하고, 준공식에서 폼을 잰다. 그렇게 잔인하고 쓸쓸하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땅 종대, 돈 용기! 끝까지 한번 가 보자!”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찜찜했고, 보고 나서 기분이 영 떫다. 일단 지나치게 잔인하다. 사람을 생매장하기, 그래 있을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잦은 집단 난투극 장면은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다. 실제보다 더 잔인한,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떼죽음을 할 만큼의 아주 과격한 난투극이 그렇게 빈번한 시절이 있었을까.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기는 모습들, 빈번한 폭력들, 잔인한 동물인 인간이라 무의식적으로 폭력에 관심이 가긴 하겠지만, 너무 지나치다.
당연히 영화를 만들 줄 아니까 영화를 만든다. 앞에서 나름 복선도 제대로 깔긴 했다. 종대와 용기, 둘이 장난으로 싸우다 전구를 깨트린 장면의 암시, 그것은 결국 이들의 우정의 깨어짐을 암시한 것일 터이니 나름 구상은 좋다 치자. 또한 이들의 집이 포클레인에 의해 구멍이 뚫린 것, 결국 두 사람이 아주 공들인 삶이, 공들인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암시했을 터이니, 그것도 그럴 듯한 설정이다.
강제 철거를 당하는 사람들처럼, 둘은 모두 다른 작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용도 폐기 당한다. 출신성분이 그러면 그저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용대가 터널 안에서 죽어갈 때, 그를 이용하던, 그리고 그를 처리하도록 시킨 서의원은 재선에 성공하고, 준공식에서 폼을 재고 있으니. 배신의 잔인함, 폭력의 잔인함, 인간의 너무 잔인함이 영 그렇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이렇게 이용당한다. 출신 성분이 미미하면 뛰어야 벼룩이다. 그냥 이용당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걸 보여주려는 것일까. 함께 가자 하지만 끝까지 가고 나면 희대의 사기꾼인 정치, 그놈만 거기 있다는 페이소스일까?
“땅 종대, 돈 용기! 끝까지 한번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