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55- 우리는 형제입니다. 실컷 웃고 질펀하게 울어라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 그 환경에 젖어들면서 자기를 만들어 간다. 원하는 자신이든 아니든 살면서 변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자신인 양 살아간다. 같은 배에서 나온, 같은 씨를 받은 형제라면 어느 정도는 다를 수는 있어도 대부분 비슷한 면이 많다. 왜냐하면 일단 유전자를 같이 물려받았고, 자라난 환경 역시 대동소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형제라도 자라난 환경이 다른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라면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이 형재들 달라도 아주 다르다. 자라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연과 하연은 형제다. 가정을 돌보지 않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는다. 그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어머니는 이들을 돌볼 수 없다. 두 아이는 고아원 여수룬에 맡겨진다. 그 중 상연은 미국으로 입양된다. 혼자 남은 하연은 어느 날 고아원을 뛰쳐나온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하연은 온갖 어려운 일을 겪으며 다양한 일로 삶을 잇는다.
이런 일 저런 일하다 무속인으로 자리를 잡은 그는 어머니를 찾아낸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상태다. 많은 돈과 노력 그리고 시간을 희생하고 되찾은 어머니. 그런데 이번엔 꿈에도 그리던 형을 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방송국 주선으로 30년 만에 형을 만나러 간다. 그런데 그날부터 일이 꼬인다. 이들의 사연을 찾아낸 윤 작가, 그녀는 하루에도 20번 이상 졸곤 하는 기면증 환자다. 기발한 사연을 찾긴 찾아냈는데 기면증 환자인 윤 작가, 설정이 대수롭지 않다. 하필 기면증 환자와 치매환자의 조합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렴풋 잡히지 않는가. 게다가 국내에 남은 하연은 무속인이다. 곧 만날 입양된 상연은 직업이 무엇일까.
둘의 만남, 첫 방송 출연을 하는 형재는 긴장한 탓에 화장실을 수없이 들락날락한다. 형제, 아직 서로는 모른다. 문제는 어머니를 화장실로 모셔간 윤 작가, 그만 잠깐 졸았는데, 치매환자인 출현자 하연의 어머니가 눈에 안 보인다. 이미 방송은 큐 신호와 함께 시동은 건 상태, 어머니가 사라진 걸 모르는 채, 30년만의 상봉으로 두 형제는 울고불고 난리다. 그런데 동생 하연은 집업이 무속인, 미국으로 입양된 상연은 목사란다. 달라도 한참 다른 두 형제의 이야기, 차분한 형, 쉽게 흥분하는 동생,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제 어머니가 등장할 차례인데 당연히 방송 사고다. 윤 작가는 이들의 어머니를 찾아다니느라 난리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디로 간 걸까, 당연히 아주 어렵게 찾은 어머니, 그리곤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하연,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가 ‘사람 찾아주는 프로인데 사람 잃어버리는 프로냐’ 고 그는 난리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호통을 치는 동생 하연, 그러자 방송 부장, 국장이 나서고 방송은 난리다.
어머니는 나름 바쁘다. 관광버스에 올라탄다. 운전기사가 인원파악을 하라고 했는데 한 명이 남는단다. 그러자 운전기사 왈 모자라는 게 문제지 남는 건 어떠냐며 그대로 출발한다. 그제야 CCTV로 이들의 어머니가 관광버스에 탄 것을 확인한 형제와 윤 작가가 차를 따라 추격한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버스를 따라잡아 휴게소에서 그 차를 가까스로 추격하는 이들이 버스에 탄다. 그런데 그들이 찾는 어머니는 없다. 이미 어머니는 이번엔 장의차를 탄 것이다. 장의차에 탄 어머니는 그만 고인의 초상화를 보자 남편 생각이 나서 울어댄다. 그러자 차안에선 난리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데 또 한 사람의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하필이면이다. 고인은 이미지가 중요한 국회의원었던 것. 아들들이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녀를 끌어내린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묻지만 이 노인 막무가내다. 형제는 그녀에게 부의금 가방을 통째로 주고는 차를 출발시킨다.
고속도로에 버려진 이 노인, 가방 하나 들고 지나가는 마음 착한 충청도 기사의 레카에 탄다.
어머니를 찾는 추격자들 하연과 상연 그리고 윤 작가 동생의 집으로 온다.
"어쩌다 이런 일하니?"
"어쩌다 이런 일, 그건 교도소에서나 하는 말 아이요. "
감사 기도를 하는 형을 보며 동생은 '닭은 내가 삶았는데' 그 생각을 한다. 게다가 ‘편안하게 하시니 감사, '지금 이 상황이 편안한 기고' 혼잣말로 투덜댄다. 결혼하기 어려운 직업이라는 하연, 결혼 안하면 어려운 직업이란 상연, 무속인과 목사 형제, 두 형제와 윤 작가가 무속인의 사당에서 하룻밤을 자야 할 판이다.
요상한 물건들을 보며 형이 하는 말 '굿도 하니?' 굿도 하니? 하루에 세 번도 한다. 엄마 찾고 보니 요양원, 약값도 외상으로 깔린 것 많아 그거 갚고 약값 대느라 하루 세 번도 한다 와.
그 시간 이들의 어머니는 대전 터미널에 있다. 그 연락을 받은 형제가 달려간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는 없다. 수소문 중에 쓰리꾼 형제에게 쓰리를 당한다. 착한 쓰리꾼 형제, 신분을 확인하니 두렵다. 목사와 무속인, 천벌을 받을 것 같다. 다시 지갑 주인 찾아 눈치 못 채게 지갑 도로 넣어주기로 한다, 빼 보기만 했지 다시 넣어주기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처럼 어렵단다. 결국 이들 어설픈 형제는 지갑을 도로 넣어주려다 현장범으로 잡힌다. 가상히 여긴 착한 목사 상연은 경찰에 선처를 부탁한다. 지갑을 빼다가 걸린 게 아니라 지갑을 넣다가 걸린 건 뭔 법죄냐는 논리를 따지다 이들을 석방한다. 상연은 이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한다. 하연이 투덜댄다. “좋은 얘기는 다 하나님이 했구만. 조상들이 다 돕고 있다 아이가.”
한편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이번엔 여수로 갔단다. 이들은 이번엔 여수로 달려간다. 다시 어머니 찾기다. 어머니는 아이를 맡긴 고아원을 찾아 헤맨다. 그 기억은 살아 있어서다. 가끔 5분 정도 정신이 돌아온다는 어머니, 아이들을 7살 9살로 알고 있는 과거의 기억에서 멈춰 있다.
신고가 들어온다. 여기 저기 어떤 할머니가 돈을 뿌리고 있다는, 부의금 봉투에 담아서 마구 돈을 주고 다닌다. 그 사건과 어머니를 찾으려는 이들의 사건, 여수경찰서에서 이들이 조우한다.
그 과정에서 하연은 상연의 사전 인터뷰 내용을 확인한다. 아들의 뇌골수 이식 수술이 걱정인 인터뷰다. 해서 하연은 상연의 의도를 의심한다. 같은 장기를 찾으려 30년 만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연은 그 속내를 감추지만 불만스럽다. 그 와중에 상연이 불쌍한 아이에게 도움을 주자 그것도 불만이다. 하연은 자신이 그 앵벌이 출신이라, 그 앵벌이는 직업이고, 그 사장이 앵벌이를 움직이는 양아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앵벌이들의 본거지를 우연히 발견한 하연과 이들이 시비가 붙는다. 싸움이 벌어지고 흠씬 매를 맞는 하연, 객기는 있으나 이들에겐 무리다.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간 상연, 말리려 하지만 칼을 휘둘러대는 양아치들, 그 칼이 하연을 향하자 상연이 그 칼을 맨손으로 막는다. 그리고는 그들을 흠씬 두드려 팬다. 힘깨나 제법 쓸 것 같은 무속인은 두들겨 맞고, 목사인 형이 이들을 팬다.
그렇게 동생을 구한 형. 알고 보니 형도 고생고생 했다. 입양된 지 얼마 후 교통사고로 양엄마와 그 아들이 죽고 양아버지는 그것이 상연이 재수 없어서 그렇다고 괴롭힌 것이다. 집을 뛰쳐나온 상연은 갱단에 들어가서 생활하다 살인을 저지르고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단다. 그러니까 어쩐지 싸움을 잘하더라. 상연은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을 거두어 키운다는 것, 속죄의 마음으로.
옛 사진으로 어머니가 찾아가는 곳이 여수룬 고아원이란 것을 안 이들, 사실 여수룬 고아원은 이름에 여수가 들어갔을 뿐 실제로는 마산에 있는 고아원이란다. 실제로 어머니는 여수룬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여수룬이란 여수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들이란 의미란다.
형은 말한다. 목사가 돼서 첫 감사 기도가 "너 대신 내가 입양 왔기 때문에 네가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은 게 감사하다는 기도였다."
드디어 형제는 다시 엄마를 찾는다. 병원에 누워 있다는 엄마, 상연은 30년 만에 만나는 엄마, 알아보지 못할까 상연은 걱정이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일이 이렇게 설레었던 적이 없었다. 잃어버렸던 엄마를 찾았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형에게 엄마를 보여줄 수 있어서 설렌다. 엄마는 형을 알아볼 수 있을까?"
상연이 병상에 누운 엄마의 손을 잡는다. 양아치의 칼을 잡았다가 다쳐서 손에 붕대를 감은 상연, 얼굴이 엉망인 하연.
“엄마!”
"둘이 또 싸웠나. 또 형한테 까불었지."
그 말은 엄마가 형을 알아본다는 의미다. 형제는 울음바다를 이룬다.
"형이가 나 괴롭히는 아들 때려줬다 아이가."
"맞나 이리와 봐라. 이런 많이도 다쳤다. 아이고. 때린 놈도 다치나. 네 손은 꼭 예수님 손 같다. 잘했다. 동생 괴롭히는 애들 잘 때려줬다. 울지 마라 괘안타."
“엄마, 엄마”
해피엔딩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형제, 같은 엄마의 아이로 태어났지만, 하나는 국내에서, 하나는 오국에서 아주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살았다. 하나는 무속인으로 살았고, 다른 사람은 목사로 살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치매다. 설정 자체가 기막힐 만큼 불행하다. 남의 불행이 나에겐 행운이라면 설정자체가 코메디 아닌가? 무수한 에피소드가 있고도 남을 사연들이다.
그럼에도 코메디이긴 하지만 영화 속엔 가족에 대한 진솔한 의미를 담았다. 그저 부담 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군데군데 아프게 콕콕 찌르는 사회 병리 현상도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닌 명예를 우선하는 정치인의 작태도 그렇거니와 오직 고나삼 가질만한 프로를 만들려는 방송국, 앵벌이의 세계, 재치가 있다. 연기자들은 전혀 웃지 않는다. 그런데 관객에겐 그 진지한 모습들이 오히려 우습다.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코메디가 아니라 그 진솔함에서 웃음이 배어 나온다.
목사와 무속인의 설정, 그게 형제라는 것, 그 둘이 하나로 합쳐지는 미학도 멋지다. 단순히 웃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그 웃음 속에 가족애와 형제애를 담아냈다는 것이 멋지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 진정한 인간성을 가진 형제가 있다. 병든 어머니 수술비를 위해 소매지기를 하는 형제가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사 분배에 더 관심이 있는 정치인 아버지를 둔 형제가 있다. 이 3종 세트를 대조해 보는 재미도 있다.
형제는 서로 오해가 풀고 한 마음으로 엄마를 만난다. 비록 온전한 현재는 아니지만 과거 속의 현재를 재생한 이들, 엄마와 어린 아이들의 모습과도 같은 그 장면에선 질펀하게 눈물이 난다. 웃다가 울 수 있는 영화다. 볼만하다. 잔인하지도 않다. 해피엔딩에서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