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63- 차가운 장미, 인생의 후반에 찾아온 아름다운 유혹 앞에선 어느 남자의 경우
이건 그저 스쳐가는 바람에 불과해요
당신의 그 사랑 얘기는요
양귀비의 열정도 눈물도 아까울 뿐이죠
끝까지 들어보면 당신도 알 거에요
그녀를 사랑한 남자가 있었어요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죠
다음날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반쯤 벗은 채로 여름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자고 있었죠
드넓은 밀밭 한 가운데에서...
그렇지만 그녀의 심장이 뛰던
하얀 육체 위엔 붉은 피 세 방울이
꽃처럼 떨어져 있었죠
한떨기 양귀비처럼 아주 여린 양귀비처럼
<차가운 장미> O.S.T ‘다정한 양귀비’ 中
차가운 장미, 아니 섬뜩한 장미일 수 있겠다. 노래처럼 끝까지 가봐야 그 진실을 알게 될 테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람,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람, 그 속을 누가 알까?
인생 반환점을 돌고나면 이상스럽게 쓸쓸해지고 외로워진다. 이유 없는 우울, 이유 없는 반항심, 이때를 사추기라고 한다. 제우스의 미움을 받아 저승으로 내려간 시시포스, 언덕으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영벌을 받은 그는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린다. 그가 드디어 언덕 위에 바위를 글려 올렸을 때면 다시 바위는 언덕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면 다시 언덕을 내려와 또 굴려 올리기, 다시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그짓을 반복해야 함을 아는 시시포스, 시시포스를 그대로 닮은 우리 삶이다.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려 언덕 위에 내려놓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는 그 순간, 그제야 앞만 향해 애써 굴려 올리던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는 순간, 그 순간엔 까닭 모를 슬픔이, 까닭 없는 외로움이, 그래서 우울함이 찾아든다.
그럴 때엔 그저 한줄기 유혹의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게 인생이니까. 그럴 때엔 양귀비꽃처럼 다가오는 유혹에 쉽게 쓰러지리라. 아니 쉽게 믿고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유혹일수록 조심하라 해도 내겐 진실로 보이고, 아무리 다른 이들이 아니라 해도 내가 보기엔 믿고 싶다. 그게 인생이라니까.
성공한 신경외과의사 폴, 폴은 성공한 의사, 능력을 인정받는 의사다. 그에겐 지적인 아내 루시가 있다. 넓은 정원이 있는 큰 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다. 다른 생각이라곤 할 여유도 없다. 아내만 바라보며, 아들만 키우며 남부러울 것 없이 잘산다. 폴 자신은 아내에겐 완벽한 남편이요, 아들에겐 완벽한 아버지다. 그는 완벽한 남자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아들이 반항한다. 그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그가 보기엔 영 눈에 들지 않는 아들이다. 능력 없는 아들이다. 다만 그게 좀 불만이긴 하지만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없다. 그런 대로 만족할 만한 삶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장미꽃이 그에게 배달되기 시작한다. 그 무렵 폴은 자신과 자꾸 마주치곤 하는 의문의 여인 루가 그런 일을 할까 의심한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그녀의 묘한 매력에 빠져든다. 앞만 보며 달려온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녀의 다정함, 진지함이 그를 편안하게 한다. 문득 나타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어디론가 사라진 그녀, 그녀가 이상하게 떠오른다. 그리움일까, 보고 싶다. 그래서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가 그녀를 발견한 곳은 창녀들의 거리, 그는 절망하며 돌아서지만 다시 그녀가 그립다. 애써 그녀를 찾아 그녀에게 따진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난 거리의 여자가 아니에요. 나 자신을 미워하고 싶을 때만 몸을 팔아요." 그는 그녀를 돕고 싶다. "인생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불행에 빠지게 된 이유들을. 그러면서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 말에 폴은 "뎀 델부아는 영혼을 다루는 예술가지만 나는 육체를 다루는 의사에 불과해. 시간은 너무 빨리 가서 잠시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다시 돌릴 틈이 없어요. 아들과 사이도 안 좋아지고, 같이 살던 가족이 멀어진 느낌이야. 아들과 아내는 가까워지고요."라며 푸념한다.
그녀가 그에게 묻는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예요?” 그가 대답한다. "몰라, 마음대로 한 지가 하도 너무 오래돼서. 당신 얘길 들어요. 아주 간단해요. 생각하지 않고, 아무 계획도 없고 당신 얘기만 들어요."
그는 생각한다. 가정에선 오직 일만 하며 살다보니 자기편이 없다. 아내와 아들이 한통속인 것 같고 자신은 소외당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면 편안하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 빨려들어 갈 것 같다. 결혼생활 삼십 년, 집에 들면 거의 하는 말은 ‘피곤해, 나 좀 내버려 둬’ 그게 다다. 아내가 불만을 표하면 ‘내가 사랑하는 거 알잖아.’다.
그러면서도 폴은 그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좋을 뿐이다. 장미꽃 선물로 시작된 이들의 사이는 점점 깊어간다. 이를 눈치 챈 아내 루시는 절망한다. 30년 동안 오직 가정만 지키며 산 그녀에겐 청천벽력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남편에게 따져 묻지 못한다.
남편의 변화를 느낀 루시, 평온하던 일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다만 며느리에게 하는 말 "빅터는 내 아들이지만 네가 불행하다면 이혼해라. 가능하면 빨리. 네 행복이 우선이니까. 남들은 이런 말 안해 줘. 진실이 두렵기 때문이야." 라고 말해주는 걸로 마음을 푼다. 며느리에겐 그렇게 조언하면서도 남편에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다. 반면 속내를 애써 감추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는 폴은 왠지 모를 서먹서먹함에 싸인다. 때문에 가정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그래서 새로운 여자 루에게서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를 잡는다. 가정을 지키려면 그녀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해서 그는 그녀와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폴은 그의 친구, 아내를 좋아하는 자신의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친구가 묻는다. 자네가 언제나 꿈꿨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내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뭐하고 싶나?" 그는 친구에게 "루를 데리고 도망갈 거야. 나 어떤 것도 꿈꿔 본 적이 없어. 인생이 이끄는 대로 끌려온 거야. "라고 대답한다. "그게 문제였나? 지금 자네 인생에 대해 불평하는 거야. 자넨 너무 운이 좋았어. 그럴 자격이 없는데, 이젠 늙고 주름만 가득한 어리광쟁이가 되어 버렸어. 마음은 메마르고 자네는 친절하지만 자기 생각밖에 못해."친구의 조언이다.
폴이 방황할수록 그의 아내 루시는 그저 낙엽을 쓸고 낙엽을 태운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친구는 있지만 그녀는 더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결국 폴은 아내와 다투고 집을 나간다. 그리고는 루를 찾아 헤맨다. 루가 다닌다는 학교에 가서 그녀의 정체를 찾지만 그녀는 그 학교 학생도 아니란다. 이전에 살던 집에도 없다. 그녀를 애타게 찾다가 결국 그녀를 찾아낸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던 그녀는 그를 밀어낸다. 그럴수록 이 남자 그녀가 더 그립다. 그가 그녀의 방을 찾는다. 그녀는 이번엔 그를 잡는다. 그에게 "당신은 당신만은 다른 사람하고 달라요. 같이 듣고 싶어요. 이 노래가 끝나면 가세요."라며. 그리곤 그녀에게 떠밀리다시피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경찰의 호출을 당한다.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 그런데 그녀의 주머니엔 그의 연락처만 있었다는 것이다.
폴은 믿을 수 없는 사실과 마주한다. 그녀의 모든 말들은 거짓이었다. 아주 치밀한 계획 하에 돈이 많은 사람들, 신사들을 유혹하여 잔인하게 죽이는 여자였다. 그렇게 그녀와 한 남자의 공모로 그렇게 걸려든 남자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증거를 없애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대상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고 경찰이 알려주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가, 그렇게 눈물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던 그녀의 말들이 모두 거짓이란 것이.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인생의 한 시점, 그는 마치 일장춘몽을 꾼 것처럼 허탈함에 빠진다.
드넓은 밀밭 한 가운데에서... 그렇지만 그녀의 심장이 뛰던
하얀 육체 위엔 붉은 피 세 방울이 꽃처럼 떨어져 있었죠
한 떨기 양귀비처럼 아주 여린 양귀비처럼
평온한 일상에 잠깐 찾아온 한 순간의 방황,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름다운 유혹 앞에 그만한 나이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 있으랴. 유혹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로다.
가지가 꺾인 채 유리병에 꽂혀 있는 장미,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지만 언젠간 시들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보잘것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변한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때문에 아무리 공고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때로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 앞에 무너지고 만다.
너무 만족스러운 삶이라도, 그래서 더 이상의 원도 없던 남자라도, 우아한 얼굴 뒤에 공허함을 감춰 온 여자의 투명하고 명확한 삶이라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게 인생 아니던가.
배달되어온 차가운 장미, 곧 시들고 말 꺾인 장미, 그 모든 것은 복선이다. 아름다움 속에 가시를, 잔인한 가시를 감춘 장미, 그 장미 속엔 그녀의 차가운 계략이 숨어 있다. 하지만 유혹 당하는 자에겐 그 안에 감춰진 가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장미의 빨간 아름다움만 보일 뿐, 무의식적으로 정체불명의 장미들을 버리긴 하지만 끝내 그 장미는 그의 병 속에 꽂히고 만다.
살다보면 여자든 남자든 이혼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겠어. 여러 번이지, 그럼에도 쉽게 그걸 결정하지 못하는 현실, 그 시기에 찾아온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름다운 양귀비, 하지만 끝을 봐야 안다는 노랫말처럼 그 유혹에 빠진 대가는 너무 크다. 그 유혹에 빠질 만큼 우리 인간의 삶들은 온갖 모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 누릴 건 누리면서 살아야 그나마 쉽게 흔들리지 않을 텐데, 늘 일에 쫓기고, 생존에 쫓기고, 인간관계에 쫓기다 보면 좀 여유가 찾아오는 순간엔 인생을 잃어버린 것 같아 억울한 감이 드니까. 그래서 곧잘 유혹에 넘어간다.
양귀비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피상적일 뿐 거기엔 어떤 함정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아름다운 장미는 그 안에 콕 질러 상처를 내는 가시를 감추고 있잖아. 감미롭고 부드럽게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그런 나이엔 자신을, 주변을 잘 돌아봐야 할 거야. 시시포스가 잠시 바위를 내려놓고 명철한 의식으로 삶을 돌아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