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66- 위험한 상견례, 때로 의미 없이 그냥 웃어라
“인생은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 비극과 희극의 정의를 아주 잘 정의한 말이다. 비극이 심각하고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면, 희극은 경쾌하고 가볍고 부담 없는 주제를 다룬다. 그렇다고 희극이 비극에 비해 인생을 아무렇게나 바라보는 건 아니다. 희극이야 말로 보다 사색적이고, 보다 관조적으로 인생을 바라본다. 그냥 생각 없이 바라보면 별 의미 없이 웃자고 하는 것 같지만 다시 바라보면 그 안엔 진지한 인생이 녹아 있으니까. 따라서 희극은 인생을 달관한 이의 것이요, 여유 있는 이의 것이요, 깊은 사색을 한 이의 것이라 하겠다.
진지한 인생 이야기를 내려놓고 가끔 가볍게 웃고 싶을 때가 있다. 코믹 영화가 딱 그럴 때 볼만한 영화다. 말 그대로 코믹, 웃자고 만든 영화다. 이것저것 다 잡으려 안 하고 순수하게 웃기자, 그 생각으로 만든 영화. 그래서 괜찮다. 인생도 멋지게 넣고, 적당히 웃기자, 감동도 주자, 뭐 이런 식으로 욕심을 부렸으면 십중팔구 망할 영화인데, 그냥 웃자는 거다. 그래서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웃어 제키다 보니 때로 뭉클한 삶도 엿볼 수 있더라.
심각한 듯 심각 아닌 심각한 듯한 코믹, 코믹한 듯 코믹 아닌 코믹 같은 진지함. 뭐 이렇게 정리함 되려나. 이렇게 뜯어 해석하고 저렇게 뜯어 해석할 여지가 없는 그냥 재미로 볼 영화다. 요즘 세상에 이런 영화 많이 나오면 좋지. 웃을 일 없는데 실컷 웃도록. 별것도 아닌 것들이 진지한 척하고, 점잖은 척하고, 정의로운 척하는 마당에 그냥 웃지. 그냥 웃지 뭐. 요즘처럼 별로 신나는 일도 없고, 웃을 일이 없다면 이 영화, 지난 영화지만 괜찮다. 이 영화는 그저 웃으면서 보면 된다. 물론 그 안에 메시지도 있다. 좀 과장일 수도 있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갈등이니 조합부터 부조화다.
전라도 청년 현준과 부산 처녀 다홍이는 펜팔로 만난 사이. 다홍이는 아가씨, 현준이는 군인, 군인과 아가씨, 두 사람 모두 순정파에다 순진하다. 그들의 어설프지만 진실한 사랑이 울렸다 웃겼다한다. 전라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는 결혼할 수 없나? 결혼하면 안 되나? 지역갈등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고 치자. 거기에 개인적인 양가 부모의 원한도 서려있다. 양쪽 아버지들의 과거의 사연을 들어보자.
전라도 청년의 아버지와 부산 처녀의 아버지는 야구선수 출신, 부산 사나이는 유명한 강타자, 광주 사나이는 잘나가는 투수로 활동한다. 먼저 선공은 투수인 광주, 시합에서 그는 고의로 부산 타자에게 빈볼을 던진다. 그 빈볼에 맞은 부산 타자, 그는 한쪽 눈을 실명 당한다. 그때부터 그는 전라도 사람을 싫어한다. 군대에서도 그는 호되게 전라도 상사에게 고난을 겪는다. 발음이 영 안 돼서 상사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맞고 터지곤 한다. 그랬으니 청년의 아버지는 처녀의 아버지를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불신이 크고 깊다.
이번에는 부산에서 공격한다. 홈으로 슬라이딩하는 광주 투수를 부산 포수가 동료의 복수를 위해 무리하게 막다가 그의 발목을 분질러버린다. 그래서 그는 다리를 절룩거린다. 그러니 처녀의 아버지는 청년의 출신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이처럼 양쪽의 만남은 만남의 순간부터 이미 완전불균형이다. 보나 마나 깨질 조합이다.
여기에서 그럼에도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며 영화는 진행된다. 이렇게 일대 일의 공격과 방어, 이 양쪽의 뿌리 깊은 원한으로, 두 사람의 결합은 아주 위험한 상견례이다. 너무 사랑하기에 다홍이를 주인공으로 세워 만화를 그리는 현준, 그는 만화가로 주목을 받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까. 이루어지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갈등이 대수는 아니잖아. 사람은 다 비슷하지. 단지 선입견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지. 어느 지역에 산다고 나쁘고 좋냐? 어디에 살든 사람 나름이지.
스토리, 그거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이 영화 봐라. 그리고 그냥 실컷 웃어라. 웃다보면 스트레스 확 풀릴 거다. 재치 있는 대사도 참 많다. 주연보다 조연들이 더 웃겨준다. 모처럼 유쾌한 영화 봤다. 메시지, 그거 신경 쓰지 말라. 메시지를 원하면 산 속에 들어가서 잠시 기도하고 오면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는 웃어라. 그 웃음으로 충분하다. 웃음에 비하면 영화 관람료 세 배 이상 내고 나와도 괜찮을 거다.
요 이쁜 사랑! 더블로 이루어진 사랑. 양복을 입은 양가의 아버지가 야구장에서 만나 한 판 벌인다. 광주 사나이가 스틱으로 치고 부산 사나이가 공을 던진다. 딱 ! 쳤다. 멋진 홈런이다. 왕년의 투수, 그에겐 첫 홈런이겠지? 이 영화의 아주 즐거운 결말이다. 이럴 땐 영어로 피날레란 말이 더 어울릴 듯 싶다. 그 말이 그 말이다만.
정상이 아닌 비정상, 평균을 넘은 비정상, 상식을 넘어서기 때문에 누가 보든 균형이 맞지 않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어떤 결합이 있어서 불안 불안한 조합, 홀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생뚱맞은 조합이어서 이미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관객은 불행을 예감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불협화음들을 우스꽝스럽게 처리하는 게 희극이다. 때문에 관객은 그저 부담 없이 웃는다. 그렇게 웃다보면 처음부터 불행의 조건을, 아니 불협화음의 조건을 넘어서 서로 화합하고, 서로 하나의 완벽한 조합으로 바뀐다. 그게 희극이다. 결국 선과 악이, 서로 상극이 실제로는 서로의 존재의미를 받쳐주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희극이 아닐까. 때문에 여유 있게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을 심각하지 않게 멀찌감치 떨어져 감상하는 듯한 여유로움에서 즐거운 삶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희극은 웃기는 게 존재가치다. 그러니 웃겨야 한다. 그 웃음은 정상이나 조화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부조화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인생을, 아니 삶이나 어떤 사건을 거리감으로 가지고 바라봄,, 여유 있는 거리감에서 나온다. 실제생활과 밀접한 사람들, 그들의 실수와 결점 등, 조금은 모자람직한 사람들의 결점을 여유 있게 바라볼 때 희극의 즐거움이 묻어난다. 온갖 실수투성이, 게다가 완전 부조화, 딱 봐도 불협화음이 일어날 듯한 조합이었는데, 그래서 우스웠는데, 웃다 즐기다 보니 어느새 이 조합이 오히려 서로 잘 맞는다. 그러니 누가 봐도 잘 맞는 조합은 때로 비극을 초래하는데, 딱 봐도 안 맞는 조합이 어느새 결말에서는 조화를 이루는 해피엔딩, 그래서 유쾌하다. 시종일관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만 슬퍼도 심각하게 슬프지 않은, 불행한 듯해도 심각하지 않은 가벼움 속에 희극의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모자람직한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조화, 이 얼마나 가벼우면서도 나를 즐겁게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