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73- 청아, 심청전과 오이디푸스 신화를 버무린 영화
영화나 소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루기보다 있을 수 있는 일, 이를테면 흔히 볼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선 일어날 법한 사건이나, 목격한 적은 없지만 어쩌다 실제로 일어난 희귀한 사건,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 수는 없으나 살고 싶은 삶을 다룬다. 그럼에도 치밀하게 짠 덕분에 사실임직해서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일 같다. 실감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 영화나 소설은 이전보다 치밀하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사람들이 신을 믿는 마음이 순수하여 신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을 믿는다 해도 이모저모 면밀히 뜯어보고 또 의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에는 인과관계를 잘 맞추지 못하면 신을 등장시키거나 기적과 같은 장치로 문제를 해결해도 무방했으나 현대는 치밀한 구성이 아니라면 실감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모티브를 <심청전>에서 따긴 했다. 출연자들을 심청전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청’이라거나 ‘심학규’라 한 것이 그 반증이다. 하지만 <심청전>자체가 허구 중의 허구인지라 현실감이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때문에 관심은 어떻게 타당성 있게, 실감나게 그려냈을까 관심이 있었다. 현대판 <심청전>이라고 할까?
홀아버지를 모시고 생활하는 청이, 그녀는 여고생이다. 아버지는 일을 하다 다친 이후로 세상을 비관적으로 산다. 일도 하지 않고 날마다 술에 빠져 산다. 그럼에도 마음착한 청이는 아버지의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드린다. 때문에 친구들과 놀고 싶으면, 아니면 친구들이 함께하고 싶어 하면 어떤 핑계를 대든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먹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방과 후엔 주유소에서 일한다. 그렇게 번 돈 중에서 급식비를 아껴 아버지 용돈은 꼬박꼬박 드리곤 한다. 그 용돈을 받은 아버지는 술을 사 마시는 게 일상이다.
이런 사정인지라 월세 주인집 아주머니는 항상 세를 받을 때면 꼭 청이에게 한다. 아버지는 그저 술에 취해 잠들고 주정하고 그게 전부다. 그럼에도 청이는 아버지 말씀에무조건 순종한다. 그녀가 일하는 주유소 사장은 그녀를 잘 대해준다. 사장의 친절에 청이는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청이는 자연스럽게 사장의 검은 의도는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청이는 사장을 믿고 술자리에 따라간다. 권하는 술에 취한 청이는 주유소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그가 던져준 돈 5만 원, 그때부터 그녀는 쉽게 돈 버는 방법을 안다. 마치 <감자>의 주인공 복녀처럼. 그와의 그런 관계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청이는 현실의 문제 때문에 정리하지 못한다. 그런 약점을 이용한 주유소 사장은 그녀에게 이젠 만 원 한 장 던져주면서 청이와 즐기려 한다.
어느 날 청이는 꽃집에 들린다. 거기 파란 장미, 그 장미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게 해주는 장미란다. 그녀는 공원에 의자 하나 놓고 그 장미를 들고 행인을 유혹한다. 아예 몸을 팔러 나선 것이다. 낮엔 학생으로 밤엔 그 일로 그렇게 생활한다. 그녀의 파란 장미, 그 장미에 관심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중년의 신사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녀는 그를 집으로 데려간다. 아버지는 옆방에서 잠꼬대를 하며 잠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녀를 안을 생각을 않는다. 그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 바란다. 청이의 마음은 오히려 그의 신사다움에 관심을 갖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그 아저씨라면 기꺼이 자신의 몸을 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신사와의 바닷가 여행, 그리고 즐거운 데이트. 그러면서도 그 아저씨에게 상처를 주기는 싫다.
한편 언젠가부터 청이가 자신을 멀리하려는 것을 눈치 챈 주유소 사장은 그녀를 찾아 나선다. 주유소 사장은 중년의 신사에게 묘한 질투를 느낀다. 두 사람은 청이의 일터라 할 수 있는 공원 벤치에서 맞닥뜨린다. 두 사람, 청이는 전에는 당연히 중년의 남자를 자연스럽게 집으로 데려가곤 했는데, 이 날은 주유소 사장을 데려간다. 이유인 즉 그 남자를 마음에 둘수록 마음이 무거워서 일부러 이 남자를 떼어놓으려고, 주유소 사장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것이다.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차지한 주유소 사장은 격렬하게 그녀를 공격한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버지가 그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는 자기 욕심을 채우고 돌아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술에 절지 않고 멀쩡한 아버지, 그가 음흉한 시선으로 청이의 방으로 들어선다. 그는 묘한 시선으로 딸에게 다가선다. 청은 그를 거부하려 하지만 어찌 도피할 도리가 없다. 결국 청은 아버지에게 마저 강간을 당한다. 그 다음부터는 때로는 아버지와 때로는 주유소 사장과 성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주유소 사장과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너무 역겹다. 하여 그녀는 어느 날 그녀를 범하러 올 아버지를 위해 마사지 여인을 부른다. 자기 대신 아버지에게 그 여인으로 욕구를 채우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는 여느 때처럼 공원벤치로 간다. 그녀는 여전히 파란 장미를 들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유혹한다. 그녀는 본격적인 매춘 생활을 하려는 것이다. 중년의 신사는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를 나무라지만 그녀는 그를 냉정하게 내친다.
그런 자신이 싫어졌을까, 집에 돌아온 청이는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청이가 집에 있으니 욕심이 동하여 그녀를 범하려 한다. 그런데 청이가 이상하다. 그는 문득 놀란다. 청이가 죽은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그는 그제야 울부짖는다. 마침 청이의 주변을 떠돌곤 하던 그 중년 신사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진 그녀는 간신히 살아난다.
살아 돌아온 그녀를 보면서 아버지는 깨닫는다. 자신이 몹쓸 놈이라며, 두 눈으로 다시는 딸을 볼 수 없다며 집 밖으로 나간다. 그러더니 들려오는 비명 소리, 청이의 아버지가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것이다. 놀라 뛰어나간 청이는 마침 찾아온 중년 신사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긴다.
다시 공원벤치로 간 청이는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려한다. 거기 나타난 주유소 사장, 그러나 청이는 그의 돈의 유혹을 뿌리친다. 열이 난 그는 그녀의 목을 조른다. 그러자 이번에도 나타난 중년의 남자가 그를 벽돌로 내리쳐서 청아를 구한다. 그 남자가 그녀에게 말한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겠느냐고, 그 남자의 소원은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달라는 것이다. 청이는 고마운 마음에 아빠라고 불러보려고 하지만 차마 그 부름이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같이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청이가 일어난다. 그런데 그 남자는 없다. 그는 자신이 주유소 사장을 죽였음을 경찰서에 자수하러 간 것이다. 그녀에겐 그의 메시지가 남아 있다. 그가 남긴 아파트에서 살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메시지를 따라 그의 아파트에 들어선다. 그 안에서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부부와 자기를 닮은 여고생 딸이 다정한 모습으로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그는 그는 자기 딸의; 그리움을 청이로 대신한 거였다. 정성스럽게 마련한 선물과 함께 파란 장미를 딸에게 건네주고 차를 출발하려는 순간, 화물차가 덮치는 바람에 딸이 그만 죽고 만 거였다. 그때부터 그는 딸을 그리워하다가 파란 장미를 가지고 사내를 유혹하던 청이를 만난 거였다.
청이는 그 남자의 메모대로 그 집으로 들어가 살기로 한다. 아버지를 모시고 그 집으로 들어간 청이는 이제까지 해온 파란 장미와 벤치 생활을 접는다. 그리고는 여고생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몸을 판다는 원초적인 의미는 같으나 방식은 달라도 아주 다르지만 <심청전>의 모티브는 맞다. 만일 심청이 현대로 온다면 어떻게 무능력한 아버지, 무절제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방법이 있을까, 그 시도를 한 것일까 싶다. 아버지와 딸 둘만의 가정에서 있음직한 모티브라고 할까. 심청전에선 원래 봉사였던 심학규, 이 영화에선 제 눈을 제가 찔러 장님이 된다는 설정은 둘 다 장님이란 설정은 같으나 본질은 다르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제 눈을 찌른다는 설정은 그리스신화의 오이디푸스의 비극에서 힌트를 얻어 그 설정을 뒤집은 것 같다.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아들 오이디푸스의 관계인 그리스신화를 뒤집어 딸 청이와 아버지 심학규의 관계로 뒤집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발상은 좋으나 저예산 영화라서 타당성이 떨어지는, 뭔가 엉성한 느낌을 주는 영화이긴 하다. 결말 부분에서 그 중년 신사의 비밀이 밝혀지긴 하지만 타당성이 떨어진다. 청이라는 아이의 변신, 급격한 변신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요상한 것이 사람의 심리라지만 그 정도 상처면 그렇게 페르소나를 가지고 의젓하게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런 남자라면 다시 접근조차 못하게 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앞설 텐데 그를 받아들인다는 설정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청이란 설정이라면 오히려 타당성이 있을 테지만, 주유소 사장을 자연스럽게 돈 하나 때문에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설정은 무리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렇다. 그렇게 고마운 아저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나서거나 궁금해 해야 옳다. 사람이라면 말이다. 아무리 막돼먹은 사람이라도 그 정도면 일단 미안해서 그를 찾아서 면담이라도 해야 하고, 그것을 쉽게 받지 못함이 당연한 설정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다. 당연한 것처럼 그 집에 들어가 산다,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간다, 그리고 심청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설정, 무늬만 <심청전>에 <오이디푸스신화>를 버무린 그렇고 그런 영화다. 그럼에도 의미부여를 한다면 사람의 욕망이란 정말 괴물과도 같다, 인간처럼 잔인하고 몹쓸 동물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라고 할까? 다만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현대판 청이 더러운 세상에 몸을 던진다의 상징성, 전설과 신화 모티브의 만남, 파란 장미의 연결의 아이디어는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