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74- 나의 첫 번째 장례식, 나와 친하다는 이들의 속내가 궁금하다!
진정한 뒷담화가 궁금하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정말 궁금할 때가 있다. 내가 듣는 데서는 훌륭하다, 좋다, 뭐 이런 저런 좋은 평가를 한다. 그런데 다른 데서는 뭐라고 할지, 어떻게 평가할지 그게 궁금할 때가 있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항상은 아니라도 때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평가를 궁금해할 것이다. 물론 사람은 죽은 이, 망자에 대해선 관대하다. 그럴 듯한 수사로 죽은 이를 추모한다. 실상 살아 있을 땐 욕을 퍼 대다가 막상 죽고 나면 온갖 좋은 수사로 추모한다. 때로 추잡한 범죄자가 정의로운 인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평가하는 이들 대부분은 직접 관련이 있는 지인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산 이들이다.
막상 아주 가까이서 가족으로 또는 친인척으로, 또는 가까운 친구로 지낸 이들은 솔직한 평가를 한다. 겉으로는 미화시켜 말해도 진실을 말할 때는 진실을 토로한다. 그게 참 궁금하다. 내가 없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는지, 내가 없는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관계들은 어떻게 유지되거나 변하는지 그게 궁금하다.
<나의 첫 번째 장례식>은 그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시도다.
“어젯밤 차량 연쇄충돌 사고로 배우 윌 와일더씨가 사망했습니다.” '운 나쁜 토끼 ‘윌’. 어린이 방송에 출연하면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윌 와일더는 어디서나 운 나쁜 토끼로 통한다. 그가 하는 역할은 온몸을 감싸는 토끼 옷을 입고 촬영하는 일이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늘 그 초록색 토끼 차림이다. 사람들은 그를 늘 운 나쁜 토끼로 기억한다. 역할 때문일까, 그는 운이 참 없다. 오늘 40번째 생일, 13일의 금요일이다. 그런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게 섭섭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짜증나는데 연출 피디는 자꾸 NG를 외친다. 화가 난 그가 그 토끼 복장 그대로 촬영장을 뛰쳐나와 친구에게로 간다.
그런데 친구 음식점 앞에 세워 둔 차가 없다. 차를 도난당한 거다. 그의 인생 최악의 날이다. 친구에게 이런 저런 불평을 늘어놓다가 뉴스를 보니 기막힌 뉴스다. 자신은 분명 이렇게 살아 있는데 자신이 사망하여 애도를 표한다는 방송이다. 이게 무슨 일, 어떻게 된 일일까? 이야기인 즉슨 그의 차를 훔쳐 타고 달아난 사람이 음주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 것, 그런데 그 차는 불에 타고, 운전자를 발견했는데, 시체가 불에 타서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차가 그의 차인지라 죽은 사람은 당연히 차주로 판단하고 보도 한 것이다. 그러니 완벽하게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가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아내의 목소리가 침통하다. 아무 말 않고 전화를 끊는다. 아내가 자기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고 침통해서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끊은 것이다. 거참 재미있다.
“누구나 한번쯤 자기 장례식에 가보고 싶어 하잖아?”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가 보고 싶다. 이대로 숨어서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그 뒷담화가 궁금하다. 사람들은 그를, 이를테면 피디는 그를 능력 있는 배우로 인정할까? 아내는 자신을 좋은 남편으로 기억할까? 딸은 자상한 아빠로 기억할까? 옛 애인은 그를 멋진 남자로 기억할까? 그걸 실제로 알아볼 수 있는, 그 진실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에게 부탁하여 인도인으로 분장한다. 그는 더 이상 윌이 아니라 인도 사람 비제이다. 그는 절친 ‘라드’의 도움을 받아 인도인 은행가 ‘비제이’로 변장하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의 첫 번째 장례식, "윌은 더 이상 여기에 없습니다." 그 조사를 들으니 기분 묘하다. 이어서 그가 아끼던 물건들이 무덤에 묻힌다. 그의 사체라곤 없으니 그가 아끼던 물건들을 대신 묻어준다는 것이다. 인형, 세미상 트로피, 그가 좋아하던 <대탈주> 영화 시디, 친구 라드가 결혼 선물로 준 야구 컬렉션 등, 그리고는 그 위에 흙이 뿌려진다. 그도 자기 무덤에 흙을 뿌린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윌은 아내에게 접근한다. 인도인으로 변장한 그는 인도에서 가장 친한 윌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은 시크교도라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그녀를 위로한다.
윌의 친구는 기어이 자신이 아끼다 윌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던 야구 컬렉션 카드를 되찾아 온다. 그리고는 그를 기념하는 시간이 그의 집에서 열린다. 그의 어머니는 윌은 착하고 순둥이였다고, 치매 끼가 있는 아버지는 그를 보고 아들이란다. 그러면서 운 나쁜 배우란다. 아내의 차례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고 남편의 인도친구분이 말해주었다며 극구 그를 불러내어 한 마디 하란다. 윌이지만 윌이 아닌 비제이는 말한다. “시크교에서는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으로 가는 다리일 뿐이죠. 그러니까 이미 윌은 우리 주변에 와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못 알아본다.
장례절차가 끝나자 윌은 옛 애인 엘렌에게 접근한다. 그녀는 말한다. “원래 장례식에선 좋은 말만 하는 거예요. 그는 위선적은 아니었지만 유치하고 이기적이었어요. 침대 매너도 엉망이었고요.”
인도인으로 변장한 윌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헐이다.
윌의 에이전트 왈, “단점보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어야 했는데......”
아내 줄리아, 미망인이라기보다 섹시한 미망인의 모습이 그를 섧게 한다. 그가 은근히 접근하자 그녀는 그에게 같이 자자고 한다. 기겁을 한 그는 실망한다. 설마 아내까지도 자신의 존재를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겼다는 반증이니까, 충격 중의 충격이다.
친구가 위로한다. 자기 이모는 37년간 결혼생활에만 충실했는데 이모부가 죽은 다음 날 홀아비와 같이 잤다고, 사람이 죽고 나면 살아 있다는 걸 느끼려는 심리라며.
이번엔 섹시한 아내에게 그의 에이전트가 실제로 접근한다. 은근히 아내의 애인이었는데 그가 모른 것이다. 마침 수작을 거는 에이전트와 그녀 사이에 고양이가 끼어든다. 이 고양이는 윌이 아끼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그는 알아보지만 다른 사람에겐 사납다. “이럴 수가! 내가 바란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게다가 ‘윌’보다 ‘비제이’를 더 좋아하는 가족들, 황당하게도 자기 남편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비제이’와 뜨거운 사랑에 빠진 아내까지… 이제 어쩌면 좋지?
에라 모르겠다. 그는 비제이로 변장한 채 아내와 즐긴다.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아내가 뜨겁다. 만족해한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내는 그럼에도 그를 눈치 채지 못한다. 붙인 수염이 완벽하고, 머리에 쓴 가발이 완벽하니까. 좀 이상한 것은 고양이가 그를 반긴다는 점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안 따르는데. 심지어 식구들에게도 안 따르는데 비제이에게만 따른다.
그러다 윌은 난처한 입장에 처한다. 다름 아닌 딸에게다. 딸이 그를 따라 나오더니 다짜고짜 그의 차에 탄다. 그러면서 자기 아빠가 자신을 망쳐 놓았단다. ‘아빠는 아주 못된 인간’이란다. 아빠도 아니란다. 아빠가 자신을 어렸을 때 망쳐놓았다고. 그래서 알 건 다 안다고, 자기와 즐기잔다. 그제야 그는 딸이 자신을 알아보고 농을 건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걸. 그리고 딸과 협상한다. 비밀로 하는 걸로.
그가 은행가로 분장하고 일을 맡는다. 처가 일이다. 알고 보니 아내가 2년간 자기 몰래 친정에 꼬박꼬박 보내준 돈을 활용하는 방법을 의논하는 중이다. 그는 마침 친구 라드가 꿈꾸던 식당을 내도록 유도한다. 장인은 어떻게 평가할까“ ‘윌이 죽었으니 말이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멍청하고 운이 없는 작자’였다고. ‘그냥 3류 배우라서, 죽어서도 살아서도 도움이 안 되는 사위’였단다. 그랬으니, 그래도 지금은 은행가로써 일을 하면서 인정을 받고 있으니, 그는 죽어서야 드디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좋은 사람으로 환생한 셈이다.
아내와의 새로운 연애, 아내는 비제이로 알고 그에게 아주 만족해한다. 그런데 고양이의 실종, 그러나 그녀는 슬퍼하면서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특출 난 사람이었다고. 그러자 그는 일부러 화를 낸다. 자신이 듣는 데서 남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그 일로 위기를 맞아 다시 결별하지만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으로 그녀를 누그러뜨린다. 그가 아침에 그녀의 침실에서 양말을 신는다. 양말을 침대에 두둘겨대며 신는다. 아뿔싸 아내가 그걸 알아차린다. 머쓱하다. 그제야 딸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아내는 안다.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아내도 속았으니까. 일류 배우인 셈이다. 그가 연기를 하는 것을 알아차린 존재는 다름 아닌 고양이였을 뿐, 그 다음에 딸이었다. 사랑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는 것이라면, 아내의 사랑은? 관심을 얼마나 덜 가졌으면 남편이 아무리 변장을 해도 모르랴! 그럼에도 그는 이제 비제이로 살아가겠단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사람으로 "내가 죽거든 조촐하게 해줘"라고 그는 아내에게 말한다. 아내는 "장례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지, 당신은 거기에 없어."라고 대답한다.
비제이로 행동하는 윌, 분명 윌은 윌인데 아주 가까운 아내마저 윌을 비제이로 잘못 안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면 사이일 수 있는 아내마저도 그를 모른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죽은 걸로 아는 지가 언젠데 다른 남자를 받아들인다. 평소엔 사랑한다는 말도, 몸짓도, 표정도 보였을 거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연극이다. 각자 적당한 가면을 쓰고 연기하며 산다. 어쩌면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진실을 숨기고 산다. 겉으로는 관계를 이르는 말로 아내다 남편이다 딸이다 아들이다 아빠다 엄마다 나름의 호칭을 갖고, 거기 걸맞게 연기하며 산다. 그러나 속내는 서로 모른다. 다만 그 역할에 걸맞게 평가하고 판단하고 믿고 살 뿐이다.
가면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진실을 숨기고 겉모습을 보여주는지 알 수 없다. 윌이 토끼 옷을 입고 연기를 하듯이, 토끼 옷 안에 있는 윌을 사람들이 전혀 모르듯, 그냥 토끼 옷을 입은 배우로 기억하듯, 사람들은 나의 겉모습으로, 나의 언어로, 나의 행동으로 나를 판단한다. 그걸 나로 여긴다. 나의 진실은 그 안에 있는데, 겉으로 드러난 나를 나로 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믿는다.
우리 모두는 그 배우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도 모른 채 지금 연기하는 역할을 자신으로 알고 산다. 죽은 후에 남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내가 알 수 없는 게 아니니까. 그저 열심히 연기를 잘하면 되는 거다. 죽은 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어떻게 나를 연출하고 연기하느냐 그게 중요하다. 지금 나는 어떤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보는 나, 그 연기는 완벽할 것이다.
다만 내가 아는 나와 사람들이 보는 나가 다르다. 사람들이 보는 나, 그게 궁금하다. 그렇다고 나의 첫 번째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으니. 막상 나의 장례식에 죽어서 참석한들 나를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달리 항의할 수도 없으니, 그래 더 살아야 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