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78- 투 스테이츠, 묵직하고 소리 없는 아버지의 사랑
그리스 신화의 파라모스와 티스베, 서유럽의 전설 트리스탄과 이졸데,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서로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외부의 방해를 받다가 결국 한 날 한 시에 죽는 순애보라는 점이다. 이 유형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반복된다. 이 유형은 영화에서, 소설에서는 물론 실제 삶에서 반복적으로 반복된다. 그러니 이 사랑들은 하나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슬프기도 하고 지독하게 아름답기도 한 사랑이다.
투 스테이츠, 이 영화도 이런 유형의 영화다. 물론 이 영화는 위의 이야기들이 비극인 것과는 달리 희극으로 끝난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제목에서 풍기듯이 두 나라, 이를테면 두 세계의 부대낌이다. 대학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크리쉬와 아난냐의 사랑이다. 아난야는 타밀인, 크리쉬는 판자비아 출신, 그러니까 여자의 신분이 높다. 그러니까 이들은 두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다.
크리쉬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한 번 본 남자라면 그녀와의 사랑에 금방 빠진다. 때문에 아난야는 자신감이 넘친다. 반면 크리쉬는 여자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른 남자와는 달리 진득하다. 많은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아난야, 그럼에도 한 남자,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한 크리쉬에게 오히려 관심이 간다. 의도적인 아난야의 접근으로 둘은 우정을 넘지 않는 선에서 사귀자는 선을 긋는다.
하지만 남녀 간의 우정이란 쉽지 않다. 자주 함께하다 보면 이성인지라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 장애물 때문에 이들은 쉽게 그 선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깊어간다. 아난야는 우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크리쉬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단다. 어떤 일에서든 정직하고 싶어 하는 크리쉬는 마음과는 달리 우정을 유지하려는 위선을 싫다 한다. 이야기에 주인공이 있든 없든, 이야기 자체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직한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싶은 것이다.
"난 사랑이 너무 혼란스러워. 이 거짓된 우정이 지겨워. 내 마음과 달리 난 연극을 하지. 다 쓴 펜처럼. 네가 잠을 훔쳐갔어. 사랑, 한 번도 원한 적 없었지만, 그 사랑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그는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선언한다. 더 이상은 고문이라고. 그 고문을 견딜 수 없다고.
사랑과 우정 사이, 아직 우정이라면서도 안나야 역시 그의 몸을 받아들인다. 몸과 마음을 서로 주고받았으니, 그 용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제부터 넘어야 할 산은 높다. 엄연히 다른 신분, 그 신분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인도란 사회에서 이들이 이 장애를 넘어서기 쉽지 않다. 하지만 크리쉬는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다. 하지만 실제로 용기 있는 표현은 못한다. 그러다 그는 마지막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한다. ‘평생 한 번 부탁하려 했는데,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다.’ 며, 그의 프러포즈에 그녀는 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제 함께 싸우기로 한다.
우선 이 두 사람은 그녀의 부모로부터 허락을 얻어내야 한다. 그녀를 얻기 위해 그는 그렇게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그녀의 집 근처로 직장을 정한다. 크리쉬는 구실을 만들어 그녀의 집을 드나들기로 한다. 우선 그녀의 남동생의 공부를 도와주는 구실을 만들어 그는 그녀 남동생의 마음을 얻는다. 또한 그녀 아버지의 피티 작업을 도와줄 기회를 얻어 멋지게 완성 시켜주면서 그녀 아버지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한다.
여자 가문의 계급이 남자 가문보다 높지만 노력 끝에 여자 쪽의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해결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남자 쪽 부모들 설득이 쉽지 않다. 그의 부모 역시 다른 계급 간에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도 잘 섞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엄마의 친정과 그의 아버지는 대면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상처를 가진 터라 다른 계급과의 결혼을 더 완강하게 반대한다.
남자의 어머니의 말 수로 걷잡을 수 없게 된 두 사람 사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난야도 더는 참을 수 없다면서 그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크리쉬와 아버지 역시 이젠 말을 섞는 것도 싫어한다.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조차 않는다. 그럼에도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다. 그녀와의 사랑을 잃느니 자살까지 생각하는 그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나선다. 체면 따위를 버리고 아난야의 집으로 찾아가서 용서를 구한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만한다. 그것도 모르는 아들은 아버지를 퉁명스럽게 대하며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절망 중에 있던 그에게 걸려온 아난야의 전화, 그는 뛸 듯이 기쁘다. 그리고는 아난야로 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을 듣는다.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 자기가 인정하는 어머니는 자신의 일을 망쳐 놓았는데, 그것을 자기가 미워하는 아버지가 풀어준 것이다. 그제야 그는 아버지를 인정한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그럼에도 그는 쑥스러워 그 감사의 표현을 못한다. 바보처럼. "내가 나쁜 남자긴 해도 어리석지는 않다. 늙어서 아들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그 말에 그는 울컥한다.
결혼식 날, 사람들은 당연히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을 것으로 안다. 아버지는 그에게 말했었다. "내가 너의 엄마 친정과는 껄끄러운 사인 걸 알잖니. 그래서 나도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구나." 그랬다. 당연히 아버지는 숨어서 지켜보거나 참석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해서 아버지의 자리엔 다른 사람이 대신 앉기로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자리에 용기를 내어 온 것이다. 아들이 다가간다. 그제야 아들이 다가간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껴안는다. 진심으로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인다.
쉽게 이룬 사랑은 둘을 행복하게 한다. 하지만 쉽게 이룬 사랑의 주제는 영화나 소설이 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서로 좋아 둘이 만난다. 만나서 결혼한다. 무난하게 사랑한다. 가정을 이루고 산다. 아이들을 낳아 가종을 이룬다. 그렇게 산다. 그리고 일생을 보낸다. 대부분 그렇다. 이런 사랑은 아름답지 않은 게 아니다. 다만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때문에 평범한 사랑, 우리가 평범하다 부르는 사랑은 드라마든 영화든 소설의 테마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반면 드라마틱한 사랑은 쉽게 이루어지 않는 사랑이다. 갈등을 겪는 사랑이다. 둘의 사랑 사이에 방해요소가 있거나, 누군가 끼어든 삼각관계이거나, 출신 가문에 방해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만큼 사랑의 테마는 갈등을 방해를 필요로 한다. 어쩌다 하나 있을까 말까한 사랑, 일반적이 아닌 누군가 아주 희귀하게 할 만한 사랑을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는 원한다. 그 대표적인 유형이 <피라모스 티스베> 사랑 스타일이다. 그 사랑을 중세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란 전설이 물려받았고, 고전주의 시대에 세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물려받는다.
이 사랑은 우선 둘이 첫눈에 반한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여건이다. 둘은 비극적으로 같은 날 죽는다. 이 틀에 짜인다. 비극적인 사랑인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비극의 늪에서 벗어난 해피엔딩이다. 그 점만 다르지 그 외엔 고전적인 수법을 그대로 따른다. 다만 공식을 살짝 바꾼다. 두 세계의 만남, 그리고 두 세계의 갈등, 그 갈등을 봉합하기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하기다.
거기엔 얼마나 많은 인내가, 그리고 용기가, 체면 따위를 생각지 않은 아버지의 아름다운 사랑이 깃들이는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아들을 망치는 데 내몬 어머니, 대신 아버지는 자신을 던지고 희생하기로 한다. 고전적인 아버지가 가인 것이다. 대신 묵직한 사랑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버린다. 자식을 위해 그런 것 따위는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란 등식이다.
그 사랑의 모습이 가슴을 울먹하게 한다. 이 모든 힘을 주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부모를 덜 사랑해서는 안 된다. 부모도 그대로, 주변 사람도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그렇게 작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쉽지 않다. 어렵다. 어려울수록 그 사랑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아픈 사랑이 좋은 것만도 아니다. 어쩌다 시작한 내 사랑이 어렵다면, 어렵다 해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랑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