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93-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그래도 남은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도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노래처럼, 아리랑처럼 아주 어린 아이가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또 버림을 받는다. 양모에게 버림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는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버림받는다.
영화는 실제가 아니어서 더 재미있다. 픽션이라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고 이것저것 과장하거나 축소하여 재미를 더한다. 그래서 영화는 재미있다. 우리 사는 현실보다 훨씬 재미있다. 또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아니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그 어느 영화보다 더한 울림을 준다. 이 영화가 그런 영화다.
서양인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동을 학대하는 것은 동.서양 구분이 없다. "1966년 가을 네살박이 유숙(최진실)은 낯선 땅 스웨덴으로 입양된다. 수잔이라는 새 이름으로 자라난 그녀는 낯선 환경과 자신의 이질적인 외모에 소외감을 느끼고,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괴로워한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녀의 양모는 그야말로 미친 X다. 어린 것을 이 핑게 저핑게로 매질을 한다. 쳐다보는 눈길이 기분 나쁘다고, 쳐다보면 노려본다고, 안 쳐다보면 왜 눈 안 마주치면서 이야기하냐고, 이렇게, 저렇게 못 살게 군다.
수잔을 양부가 아껴주면 그 아껴주는 만큼 더 괴롭힌다. 먹는 문제부터 청소, 공부, 그 모두가 시빗거리다. 사람이 악하면 얼마나 악해질 수 있을지, 히스테리컬하면 얼마나 더 그렇게 될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게다가 양오빠, 이놈도 양모와 다를 게 없다. 사사건건 시비 걸고 미워한다. 그러니 이 아이가 어떻게 살까,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 결국 그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사람은 잘도 죽더라만, 죽겠다고 시도하는 사람은 잘 죽지도 않는다. 그때마다 용케 살아난 수잔은 그저 참고 산다.
18세까지만 버티자. 그때부터 자립을 할 수 있다. 그게 법이니까. 무슨 짓을 하든 그때가 되면 그 집을 떠나리라. 18세 자립이다. 양부는 좋지만 다른 가족 속에서 산다는 건 죽느니만 못하니까, 그녀는 학교 기숙사로 옮긴다. 그 소굴에서 나오는 것, 미친 가족들에게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자유롭다. 살만하다.
그러나 잔혹한 운명의 여신이 그녀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18세의 나이에 참 좋은 남자? 누구에게 사랑 받아보지 못한 그녀에게 그 남자는 천국과 같은 남자다. 친부모로부터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양부모로부터 따뜻한 느낌 가져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 사랑에 굶주린 그녀에게 그 남자는 그 무엇보다 삶의 위안이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했다. 모든 불행이 그러하듯 그녀가 임신을 하자 그 남자, 그리 좋던 남자가 떠난다. 그게 그 남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걸 모른다. 여자는. 남자의 친절이, 남자의 따스함이 사랑인 줄 안다. 그리고 배신을 당한다.
그럼에도 그 아이를 지우지 못하는 그녀, 자신이 버림 받은 적이 있으니 그녀는 그 아이를 버리지 못할 거다.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거리에서 진행된 통증, 거리에서 쓰러진 그녀, 택시가 발견하여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팔자 사나운 사람 그 팔자 쉽지 않다. 죽다 살다 죽다 살다, 그렇게 살아난 그녀는 아이를 기르며, 아이에게 위안을 받으며 그런 대로 살아간다.
인생은 다시 그런데다. 그런데, 그녀에게 나타난 거리의 악사, 이번엔 진실한 사람이다. 아이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남자, 그 남자 못지않게 착한 그 남자의 어머니, 이혼한 후 아들을 혼자 키웠으니 수잔을 잘 이해할 것 같다. 이제 그녀는 안정을 취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게 팔자다. 그리고 사람이다. 그녀가 누구보다 믿었던 친구, 그녀가 수잔의 남자를 사랑한다. 갑자기 연락 없는 남자, 그 남자가 그녀의 친구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 현장을 찾아간 그녀는 돌아선다. 그녀에게 더 이상 삶의 에너지가 없다. 사랑하는 딸을 생각하면 차마 못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산다는 것은 지옥이다. 더 이상 마음 둘 곳이 없다. 믿을 사람이 없다. 사람이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게다가 세트로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배신 당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짐승보다 무섭다. 사람이 야수보다 잔인하다. 참 추하고 더럽다. 그녀의 선택은 죽음이다.
아이를 그 남자의 엄마에게 맡기고, 시도한 자살,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살아남는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것도 팔자다.
그녀가 아는 한국어는 아리랑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삶을 의탁했던 종교, 그곳의 선교사가 가르쳐 준 노래, 그것이 아리랑이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이 살아난 병원에서 들었던 은은한 교회 종소리, 그 소리에 의지해 찾아갔던 교회에서 그녀는 선교사를 만나고 삶의 용기를 그나마 얻는다.
그런 그녀에게 한 방송사 피디가 접근한다. 입양아를 다루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것, 처음엔 허락했으나 내키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알려서 그런 불행을 막아보자는 피디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린 그녀가 출연한다.
그녀에게 들려운 뜻밖의 소식, 그렇게 원망스럽던 친모가 살아 있단다. 왜 나를 버렸느냐고 묻고 싶었던 엄마가 살아 있단다. 그녀가 나오는 방송을 친모가 본 것이다. 그녀가 친모를 만난다. 울음의 산을 쌓는다.
많은 아이들, 부모로부터, 우리 사회로부터 버림 받은 아이들, 어떤 사정으로든 버림 받고 부모의 사랑 받아 보지 못한 아이들이 외국으로 입양된다고 한다. 얼굴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른 곳으로 입양을 당한다.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선택 당해진 그들이 환경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다른 곳에서 제대로 사랑 받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
입양 되었으니 잘사는 나라에서 잘 살고 있으려니 하지만, 편견과 학대로 고통을 당하며 지내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그 지옥 같은 생활을 비관해서 자살을 시도하고, 결국 태어나서 사람다운 대우 한 번 받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도 있단다. 책임지지 못할 아이를 왜 만들어 내고 태어나게 해서 한 생명을 괴롭히냐고. 사랑이란 것이 좋긴 하다만 그러면 아이라도 만들지 말 일이지. 참 나쁘다. 아이를 낳아 책임을 지지 못하면 나쁘다. 어떤 핑계로도 그건 용서가 안 된다.
꿈에 그리던 친어머니와의 해후를 한 수잔. 시간의 강을 넘어 상봉한 두 모녀는 한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수잔, 그 수잔 역을 맡은 배우, 그녀가 최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