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110- 다이버전트, 플라톤의 철인정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연상하게 하는 영화
사람은 누구나 신 앞에 평등하다, 구호는 참 멋지다.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그런데 실제 세상은 전혀 아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뉜다. 어느 사회건 상하논리가 없는 곳은 없다. 심지어 계극 없는 사회를 꿈꾼 공산주의도 더 끔찍한 계급을 인정하면서 외면을 받는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반듯한 사회를 설계했다. 평등한 사회와는 전혀 다른 철인왕국, 즉 계급사회다. 플라톤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고 철학으로, 이상으로만 남았지만 실제 계급사회를 구현한 예는 있었다. 힌두교를 통치철학으로 한 고대인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분하여 변하지 않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비록 제도적인 계급은 없더라도 우리 사회도 뜯어보면 계급은 엄연히 존재한다. 심지어 어느 정도는 대물림되기도 한다.
계급사회가 이상국가일 수도 있다는 소설도 있었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도 그런 류다. 그는 그의 책에서 탄생 때부터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 고정된 계급사회를 이상국가로 설정한다. 물론 그는 이상 국가인 멋진 신세계는 실패하는 것으로 결말짓는다. 결국 원시족에서 태어나 감정에 충실한 사람에 의해 그 이상 사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헉슬리의 소설이다.
이 영화, 다이버전트는 이와 유사하다. 전쟁 100년 후 세상은 새로운 계급 사회로 분파 된다. 주는 다섯 개의 분파, 에러다이트(지식). 에머티(평화), 캔더(정직), 돈트리스(용기), 애브니게이션(이타심)이다. 영화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분파는 에러다이트, 돈트리스, 애브니게이션이다. 위에서 언급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과 거의 유사한 발상이다.
베아트리스의 부모는 애니브게이션(이타심) 분파로 애러다이트 분파의 경계대상이다. 그런데 열여섯 살이 된 베아트리스의 오빠는 예상을 깨고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애러다이트를 선택한다. 베아트리스는 놀란다. 에러다이트는 자신들의 부모인 애니브게이션을 적으로 삼는 분파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차례, 그녀는 돈트리스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오빠는 에러다이트, 베아트리스는 돈트리스, 부모는 애니브게이션, 각기 다른 분파에 속하여 살아가야 한다. 지식과 용기가 결합하여 이타심이란 감정을 없애면 세상은 이상사회란 설정인 셈이다.
그녀는 이제 오빠가 속한 분파의 노예가 되어 부모의 분파를 없애는 일에 나서야 한다. 돈트리스를 선택한 주인공은 이름을 트리스로 바꾼다. 그녀는 돈트리스를 선택하면서 재측정 결과 측정불가의 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정 받는다. 그녀는 '다이버전트'인 것이다. 다이버전트는, 어느 분파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러 성향, 여러 재능을 고루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녀가 비록 돈트리스를 선택하여 용기 분파로 간 셈이지만 다이버전트로 변한다는 의미는 용기와 이타심의 결합은 가장 강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때문에 그녀는 에러다이트에서 개발한 감각 통제 시스템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한 강한 의지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에러다이트 분파에서 가장 경계 대상으로 삼는 분파이다. 이런 존재가 태어나면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룰 수 없다. 다섯 분파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나로 묶어 그 위에 서려는 흉계를 꿈꾸는 이들에겐 이타심을 가진 이들이 가장 경계 대상이다.
다이버전트의 능력의 소유자 베어트리스는 비록 돈트리스에 소속되어 있지만,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에러다이트 지도자의 흉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는 지혜와 용기로 돈트리스에 소속되려 무진 애를 쓴다. 그녀는 그 혹독한 과정을 무사히 넘긴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잘 조정하면서 돈트리스 일원에 합류한 것이다.
그녀의 측정에 도움을 준 이는 포다. 포는 가장 훌륭한 전사이다. 그는 가장 뛰어난 돈트리스 대원이자 교관이다. 그는 가장 돈트리스 적이면서 다이버전트를 꿈꾼다. 베아트리스는 다이버전트의 능력을 가졌으나 돈트리스로 살려하고, 포는 돈트리스 능력이지만 다이버전트를 꿈꾼다. 한 사람은 꿈꾸고 한 사람은 머물려는 속성, 그럼에도 둘은 일치하는 점이 있어 서로 교감한다. 덕분에 그녀는 모든 측정 과정을 무사히 넘긴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애러다이트의 흉계를 알아차린다. 애러다이트의 흉계, 이타심인 애니브게이션 분파를 없애려 하니 이들을 막아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녀가 속한 돈트리스는 적어도 애러다이트의 적은 아니다. 협조 대상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안일보다는 부모를 구해야 한다. 그 일도 포가 돕는다. 하지만 둘은 무력하게도 체포당한다. 그리고 둘은 각자 다른 장소로 끌려간다. 포는 아주 지독한 세뇌를 당하고는 기계처럼 변하고 만다. 그녀는 죽음 일보직전에 전직 돈트리스였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아버지를 찾아가는 중에 결국 어머니는 딸을 구하고 죽고 만다.
아버지를 찾은 베아트리스는 애러다이트가 진행 중인 돈트리스 분파를 세뇌 시키려는 작업을 분쇄하러 나선다. 그제야 그녀의 오빠도 그들의 흉계를 알아차리고 애니브게이션에 가담한다. 그 전쟁에서 아버지는 용감하게 죽는다. 이제 남은 일은 돈트리스의 일이다. 성공이냐 실패냐, 세상을 구하느냐 구하지 못하느냐는 그녀에게 달려 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체포당하여 실험대에 묶여 있는 포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그를 구하려 한다. 하지만 포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를 공격한다. 포는 이미 그들의 프로그램화되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를 포기하지 않는다.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그녀는 강렬하면서도 애절한 눈길로 포를 부른다. 그녀의 사랑이 통한다. 포는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리곤 두 사람이 협력하여 애러다이트의 흉계를 무산시키고 정상을 되찾는다.
이 사회는 '핏줄보다 분파'가 중요한 사회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이들은 열여섯 살이 되면 테스트를 거쳐 해당 분파를 결정한다. 이 테스트에서 정해지면 그 일원으로 평생 살아간다. 일단 테스트를 통해 분파를 결정하면 그 결정에 맞춰 분파를 선택하도록 한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자유의지다. 그렇게 한 번 결정하면 가족과도 이별을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헉슬리의 소설에서 보여준 결정론과는 차이가 있다. 헉슬리의 소설은 이미 탄생과정에서 소속을 결정하고, 그 인자를 가지고 평생 살아간다. 그는 맞춤 생산을 하니까 부모조차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맞춤형 생산은 아니다. 부모가 있고, 그 유전인자를 안고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났더라도, 어느 특정 분파 성향이 나타나더라도 분파 결정은 자유의지에 맡긴다는 발상이다. 몇 가지 점만 제외하면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을 일부 바꾼 것에 다름 아니다.
애니브게이션은 이타심으로 남을 돕고 봉사하는 성향을 가진 선한 사람들이다. 에머티 분파는 평화 제일주의를 지향한다. 돈트리스는 힘 또는 용기를 지닌 분파로 사회의 통제와 질서 유지를 위한 분파로 사회의 치안을 담당한다. 에러다이트는 분파는 지식을 가진 분파다. 이 설정은 플라톤 식으로 철인계급이다. 캔더 분파는 정직을 모토로 도덕을 제일주의로 삼는다. 그리고 이들 분파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분파는 없지만 뛰어난 존재들인 다이버전트,' 벗어난'이란 뜻의 '다이버전트(divergent)'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다이버전트>는 체제나 시스템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열여섯 살, 이제 분파를 선택해야 할 시기다. 이들이 어떤 판정을 받았는지 서로 모른다. 적성에 따라 그 분파로 가든 다른 분파로 가든 결정해야 하는 시기다. 대부분 부모의 분파로 간다. 아무리 핏줄보다 분파가 중요하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니까. 열여섯에 이르러 부모의 분파를 이어받으면 그들은 안정적으로 그 소속으로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분파를 선택하는 순간 그 분파에 적응하고 따라야 한다. 거기서 적응하지 못하면 그들은 낙오자가 된다. 그들 낙오자는 무 분파로 분류되어 거리로 나서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고 만다. 무 분파와 다어버전트는 하늘과 땅 차이다. 다이버전트는 어디든 소속 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지배를 꿈꾸는 에러다이트 분파에겐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다이버전트는 어디에도 순응 불가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어떤 분파이든 자녀들이 고정관념 없이 스스로 분파를 선택한다는 것, 혈연보다는 분파 우선, 감정보다는 이성 우선이라는 설정은 현대를 사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의지를 아는 자만이 미래의 주인이라는 메시지는 현실에 충분히 적용할 만하다.
이상세계는 평화로운 공존을 이어간다. 그런데 지식 계급인 에러다이트의 지도자가 분란을 일으킨다. 그의 음흉한 욕심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감정을 억제 시켜서 완전히 기계처럼 바꾸려 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속한 에러다이트들 마음대로 통제하려 한다. 그러려면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에다 협조자를 얻어야 한다. 그 계급이 돈트리스다. 그러니까 에러다이트(지식)와 돈트리스(용기)의 결합이다. 지식과 용기만 있으면 모두를 지배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둘이 결합한다고 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타심으로 애브니게이션이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두 종족은 애브니게이션(이타심)족을 경계한다. 이타심은 이들의 기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러다이트 족은 돈트리스 족을 이용해 애니브게이션 분파를 없애려 한다.
그럴 듯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의 무의식까지 측정하여 다섯 분파로 나누는 것이 가능할까는 의문이다. 그렇게 인간이 단순한 존재라면 이처럼 물질문명이 발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존재이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문명은 발전을 거듭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그럴 듯하다. 그 책에서는 계급이 혈액량을 조절하며 아예 처음부터 맞춤 생산을 한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애러다이트 분파는 정치집단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들의 방식은 현재의 정치지도자들,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자신들이 가진 지배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방해 되는 분파를 제거한다든지, 요주의 민물들을 없앤다든지 하는 건 정치집단의 성격을 설명한다. 정치적 성향이 있는 집단은 인민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하다. 게다가 힘을 상징하는 군대를 이용하려는 집단의 시도는 정치집단과 꼭 닮았다.
돈트리스 집단은 용기 또는 힘을 지닌 집단으로 군대를 상징하며, 플라톤의 전사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집단은 자칫 잘못하면 권력의 시녀로, 그들의 앞잡이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용기야 말로 아주 훌륭한 것이나 어느 것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중추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지식과 용기의 결합은 비극이지만, 용기와 이타심의 결합은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이긴 하지만 집단의 특성을 철학으로 지배로 해석한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와 올더스 헉슬리의 계급론을 결합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기계적인 시스템은 성공할 수 있을까. 처음 의도대로라면 그건 이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라는 것도 불순한 마음을 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일시에 무너지고 만다. 이 영화에서 설정한 분파 사회는 이상사회지만 헉슬리의 이상세계에서 존이라는 원시적인 존재, 감정적인 존재에 의해 무너지는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상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이 분파에 어느 분파에도 들 수 없는 위험한 다이버전트, 그 존재는 그나마 인간들 중 가장 인간적인 존재다.
다이버전트는 우리가 닮아야 할 성향이라기보다 누구나 이 다섯 가지 성향은 있다. 다만 어느 성향이 강하냐로 성향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질제로 한 인간인 우리는 가끔 갈등을 겪곤 한다. 이 다섯 가지 성향이 내면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지식, 용기, 이타심, 정직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느 것이 더 강하냐 아니면 개발하느냐, 또는 언제 어디서 어느 것이 출력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 모두를 합하면 다이버전트 즉 균형 잡힌 인간이다.
그러한 균형과 조화를 잡아주는 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은 이념보다 강하다. 사랑은 세뇌보다 강하다. 사랑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여자와 잘 생긴 남자의 로맨스를 통해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이들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다. 그 사랑이 자칫 무너질 수 있는 사회를 지킬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고 아름답다. 베아트리스와 포의 사랑은 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