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143- 인도차이나, 인도차이나와 프랑스가 하나라는 모순을 보여준 영화
남자와 여자, 인간과 신, 인도차이나와 프랑스, 이들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서서히 그런 관계들을 조망한다. 삼각관계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남녀가 사랑을 한다. 이를 토대로 얼핏 보면 이 영화는 그렇고 그런 사랑을 그리는 영화 같지만, 실제로는 상징성을 부여한 수준 높은 영화다. 위에서 말한 식민제국의 위선, 식민제국에 빌붙어 안주하는 기득권 층, 위선과 이중성을 이 영화는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어떤 한 층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찾고 그들을 따라가면서 영화가 보여주는 상징성을 읽는다면 멋진 영화 보기가 될 것 같다.
1930년대 프랑스 치하의 사이공, 즉 인도차이나 반도다. 당시 인도차이나와 프랑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의 식민치하임에도 인도차이나의 기득권층은 프랑스 지배층과 함께 자유를 맘껏 구가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중들은 식민제국의 노예로 근근이 생활한다. 아니 근근이 산다기보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버지와 함께 인도차이나에 온 엘리안은 여장부처럼 노예들을 거느리고, 노예들을 부린다. 그녀는 이들에게 고무나무 액을 채취하게 하는 일을 시킨다. 그러다 원주민 중 고아인 까미유를 양녀로 삼아 신식 교육을 시킨다. 엘리안은 까미유의 약혼녀인 탄을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 공부하게 한다. 탄과 까미유는 어릴 적에 이미 약혼한 사이다. 프랑스와 인도차이나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상징적인 의미일 수도 있는 만큼 다분히 의도적인 관계 맺기다.
그도 그럴 것이 까미유는 베트남 황족 출신이다. 부모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 바람에 고아가 된 아이다. 그런 배경 때문에 엘리안은 그녀를 수양딸로 삼은 것이다. 까미유의 예처럼 비록 식민치하지만 좋은 환경에서 탄생하고 자란 아이는 여전히 좋은 대우를 받는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의 아이들은 노예 생활을 해야 한다.
당당하게, 씩씩하게 고무나무 농장을 경영하는 엘리안은 억센 노예들을 곧잘 다룬다. 그녀에게 어느 날, 장래가 유망한 프랑스 장교, 자기 임무에 충실할 줄 아는 장교인 장 밥티스트가 엘리안에게 접근한다. 그는 길을 잃고 거기까지 왔다면서 엘리안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작전에 잘 넘어가지 않지만 그럼에도 적극적인 프러포즈를 받아보지 못한 엘리안의 마음엔 사랑이 싹튼다. 결국 적극적인 그리고 지속적인 구애에 넘어간 엘리안은 장이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사랑에 푹 빠진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직 딸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사이 장을 불러들였다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아버지와 맞닥뜨린 장, 그 일로 인해 둘의 사랑은 위기를 맞는다.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그녀의 아버지는 장에게 거액을 주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 한다. 남녀 관계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장은 결국 그녀의 아버지의 재력에 의해 그녀를 떠난다.
그런데 이 와중에 탄이 프랑스에서 돌아온다. 그가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탄의 어머니는 탄과 까미유를 결혼시키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까미유가 외출 중에 한 사건을 만난다. 강제로 감옥으로 끌려가던 한 공산주의자가 탈출을 시도하려다, 그를 추격하던 경찰이 쏜 총에 그 남자가 쓰러지는 중에 하필이면 그는 까미유의 몸 위로 쓰러진 것이다. 깜짝 놀란 까미유는 기절한다. 마침 그것을 목격한 장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 남자를 들어내고 까미유를 안아 올린다. 정신을 차린 그녀와 장은 우연히 눈을 맞춘다. 묘한 시선의 교환이 오간다. 그녀는 장이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안다. 그 순간부터 장을 사랑하게 된 그녀, 장과 사랑을 이미 나눈 엘리안, 모녀간의 기구한 삼각관계는 이들의 운명을 가르는 분깃점이 된다.
까미유는 어머니의 속도 모르고 자기 사랑을 어머니인 엘리안에게 고백한다. 엘리안은 자기 마음을 숨기고 까미유와 탄을 억지로라도 결혼시키려 한다. 하지만 못내 원하지 않는 까미유, 사춘기 소녀의 사랑은 이미 장을 향해 있으니 누가 말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결혼을 강요당한다. 모녀와 장과의 삼각관계,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엘리안의 선택은 결국 장을 멀리 보내는 일이다. 장군의 힘을 빌려 그녀는 장을 끝내 오지로 보내고 만다. 까미유와 탄은 원하지 않는 결혼식을 올리긴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목적이 다른 곳에 있는 탄은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탄은 까미유를 자유롭게 떠나게 한다.
까미유는 장을 찾아 머나먼 길을 간다. 어렵사라 그녀가 장을 찾아갔을 때는 그녀는 노예의 몸으로 팔려가는 신세다. 노예 일행 중에서 그녀를 찾아낸 장은 그녀를 그들 틈에서 빼온다. 하지만 무리의 폭동을 우려한 군 당국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를 막아서는 군경과 대치 중에 까미유가 프랑스 장교를 죽이는 사고를 저지른다. 그 길로 두 사람은 위기를 벗어나 도망을 친다.
둘은 이제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유랑극단을 따라 이동하며 살아간다. 까미유는 장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을 한다. 장은 아이의 이름을 에티엔이라 짓고, 아내가 잠든 사이에 냇가에서 세례를 주려한다. 그 순간 그는 경찰에 잡히고 만다. 아이와 함께 잡힌 장은 교도소로 가고, 아이는 엘리안에게 맡겨진다.
연인의 아들이자 수양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안은 그 아이를 사랑한다. 장은 자신의 아이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자 엘리안은 장에게 하루라도 아들 옆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힘도 써준다. 그런데 장은 아이를 안은 채 그 날 자살하고 만다. 실상은 그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였다. 장과 까미유를 돕던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그들의 의도에 따르지 않자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장과 까미유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위기에서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까미유의 옛 약혼자 탄이었다. 탄은 공산주의자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 다.
장은 자살로 처리된다. 그 후로 장과 까미유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민중들에게 회자된다. 유랑극단은 그들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연기한다. 그러다 결국 까미유도 유랑극단을 급습한 경찰에 체포당한다. 그녀는 5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자유를 얻는다. 엘리안은 석방된 까미유를 찾아서 그녀에게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준다고 한다. 하지만 까미유는 끝내 인도차이나를 위한 투쟁을 위하여 엘리안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까미유는 엘리안을 떠나는 바람에 에티엔은 엄마를 만나지 못한다. 엘리안은 재산을 처분하고 프랑스로 에티엔을 안고 돌아간다. 그리고 인도차이나가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다시 엘리안은 에티엔과 함께 인도차이나에 돌아오지만 더 이상 까미유를 만나지 못한다.
엘리안과 까미유는 각기 프랑스와 인도차이나와의 관계의 상징이다. 그들은 결국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으나 떼어지고 만 것처럼, 인도차이나의 절반은 자유체제, 다른 절반은 공산체제로 나뉘어 분리된다. 세상엔 온전히 붙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녀의 사이도, 인위적인 부모와 자식사이도 결국 원래대로 떼어지고 만다. 모든 것은 원래부터 하나였으나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었으니, 서로 분리되어 살아간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은 분리를 즐긴다. 그러다 또 다른 구실로 하나로 살겠다고 한다. 하지만 각자의 욕심에 따라 분리될 수밖에 없으니, 인간 스스로 비극을 만들어 간다.
식민 통치자를 상징하는 엘리안, 그 아래서 노예여야 하는 까미유, 이들 관계는 어차피 하나가 아니라 의례적인 하나, 주인과 노예 사이 다름 아니다. 마치 은전을 베풀기라도 하듯, 미개한 이들에게 그들의 문명화를 돕는다는 구실로 그들을 개회시키려 하지만, 그들의 내심엔 식민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식민 제국자의 위선을 이 영화는 문제로 삼는다. 물론 지배자들은 내심으로도 진정 원주민들을 위한다, 돕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생각일 뿐 피지배자들에겐 그건 강요이고, 불편함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탄이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왕족의 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산 까미유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했을까? 프랑스와 인도차이나는 하나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인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르쳐주었고 인도차이나는 복종을 가르쳤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는 탄의 말처럼 그만큼 교육은 중요하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인간을 위한 제도가 아니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리 지배하는 계급이 인간적인 마음을 갖고 있어도 자기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선의는 아니다.
지배자 프랑스를 대변하는 엘리안은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다. 진심으로 까미유를 사랑하고, 그녀가 비록 자신과 연적 관계가 되었어도 끝내는 그녀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자기가 받아들인 아주 일부에게만 따뜻한 사랑을 베풀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인도차이나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그들을 부린다.
자기 특권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는 한 하나일 수는 없다. 그게 프랑스 지배층의 한계였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프랑스 지배층과 인도차이나 지배층과의 이기적인 합작, 일반 시민들의 노예화, 이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 지배자 엘리안, 인도차이나 지배층 까미유, 엘리안이 부리는 노예들의 관계다. 베트남 사람들의 진정한 차이는 피부색이 아니라 과일 맛의 차이라고 그럴듯하게 말은 하지만 여전히 남을 부리는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그건 위선에 불과하다.
까미유와 탄은 인도차이나를 대변한다. 이들은 광기, 분노, 반항과 같은 미칠 듯한 사랑을 통해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리고는 그들의 편안한 자리를 버리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들이 프랑스라는 폭력에서 떨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의미다. 까미유와 탄은 비록 프랑스의 식민지하에 있어도 충분히 편히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귀족이다. 그런 그들이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기득권자들의 이중성, 위선적인 모습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 장교 장과 베트남 왕족 까미유의 사랑의 결과, 사랑의 흔적은 에티엔을 남긴다. 에티엔은 어떤 미래의 희망일까? 프랑스인이긴 하지만 기득권에서 멀어진 장, 그렇다고 온전한 공산주의자도 아니면서 필요하니까 도움을 받고 무늬만 공산주의를 흉내 낸 장의 죽음, 왕족이긴 하지만, 프랑스인으로 편입되지만 그것을 박차고 나와 자유를 원하여 다시 노예로 떨어진 까미유, 결국 미래의 산물은 기득권과 기득권의 의도적인 하나로는 성공할 수 없고, 민중과 민중이 진정으로 화학적 결합을 할 때에만 진정한 하나가 가능하다는 상징일 것이다. 기득권층은 항상 하층민을, 민중을 교화하는 척하고 이용한다. 그들은 누리면서 민중에게 은전을 베푸는 양 한다. 겉으로는 잘 포장해 보여주면서 마치 애국자인 양 한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