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제815회 - " 어린왕자 : 작은 희망의 끈으로 묶고 있는 인간의 사막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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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1
삶이 괴로워서 죽고 싶다면 모를까, 괴로워하면서도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살아갈 길이 없다면, 죽어야 한다면 삶은 더 두렵고 괴롭습니다. 차라리 삶의 끈을 놓을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터, 하지만 살고 싶으니 어딘가 메여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삶을 포기하기 전에는 무엇엔가 묶여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안할 겁니다.
아름다운 유혹, 신기루에 마음을 홀리며 40여 키로 걸은 하루 온 몸이 나른하고 힘에 겹습니다. 생텍쥐페리 일행은 더 이상은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아직은 살아날 희망이 있어서 입니다. 이들이 믿을 수 있는 기적이란 동료들의 탐색에 희망을 거는 일입니다. 동료들이 그래도 볼 수 있는 표지라고는 빨갛고 하얀 항공표지입니다. 해서 그들은 아침에 떠났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동료들의 탐색, 그 드넓은 사막에서 그깟 항공표지란 아주 작은 표식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기회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갈등이 생깁니다. 어쩌면 지금 가는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일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 가면 사막의 끝일지도 모르는데 다시 발길을 돌려야 한다니 말입니다. 저어기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손짓하는데, 저기 오아시스가 있는 작은 숲이 있는데,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고요. 이제는 신기루에 속을 힘도 없어서 입니다.
돌아와 비행기 옆에 눕습니다. 60키로미터를 사막을 걸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걸었습니다. 그들은 그 60키로라는 끈에 잡혀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 희미한 구원을 희망하면서. 그 희망 속에서 꺼져가고 있을지 모르는 희미한 생명을 부여잡고 있으면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아내가 웃고, 친구들이 웃고, 동료들이 웃으며 말을 걸어 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사막 하늘엔 별들만 총총합니다. 다시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찾던 동료들이 애타게 부릅니다. 그런 반복 속에 자는 둥 마는 둥 하룻밤이 갑니다.
생텍쥐페리가 생명의 구원이란 갸냘픈 희망의 끈에 매여 더는 더 이상 멀리 가지 못하고 돌아오듯이 우리 또한 더는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더는 멀리 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줄에 매여 있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다른 건 다 사라져도 희망만 있으면 세상은 살만하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이 헛된 것이란 걸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고, 희망의 다른 이름은 절망이라는 것을 느낄 때 인생은 참 버겁고 힘겹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잘 가던 길을 멈추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말라 합니다. 종교란 이유, 도덕이란 이유, 양심이란 이유, 친척, 이웃, 친구라는 나 아닌 타인의 시선이 나를 줄로 잡아 끌고 있습니다. 희망이 우리를 구속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살아갈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게 때로 힘에 겹고 슬플 때도 있지만, 그것은 살아 있음의 축복이라고, 놀라운 기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나를 잡고 있는 줄이 있다는 것, 나를 구속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 무엇인가를 의식하며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란 혼자 살아갈 공간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공간이기에 어떤 형태의 구속이든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아침, 그럼에도 한 없이 인간이기를 포기 하지 않으며, 그런 대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게 다행입니다. 다시 돌아와 구원의 희망인 비행기 잔해 옆에 누워서 절망을 씹어 삼키고 있던 생텍쥐페리를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도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끈의 길이를 조정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삶의 비행기의 잔해, 추락당한 비행기의 잔해 옆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 줄의 길이를 늘려야 할까요? 그 길이는 자기 합리화란 길이입니다. 그 길이는 스스로 정한 길이입니다. 그 길이를 적절히 자기 능력에 맞게 조정하여 괴로움이 아닌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유혹, 신기루에 마음을 홀리며 40여 키로 걸은 하루 온 몸이 나른하고 힘에 겹습니다. 생텍쥐페리 일행은 더 이상은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아직은 살아날 희망이 있어서 입니다. 이들이 믿을 수 있는 기적이란 동료들의 탐색에 희망을 거는 일입니다. 동료들이 그래도 볼 수 있는 표지라고는 빨갛고 하얀 항공표지입니다. 해서 그들은 아침에 떠났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동료들의 탐색, 그 드넓은 사막에서 그깟 항공표지란 아주 작은 표식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기회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갈등이 생깁니다. 어쩌면 지금 가는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일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 가면 사막의 끝일지도 모르는데 다시 발길을 돌려야 한다니 말입니다. 저어기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손짓하는데, 저기 오아시스가 있는 작은 숲이 있는데,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고요. 이제는 신기루에 속을 힘도 없어서 입니다.
돌아와 비행기 옆에 눕습니다. 60키로미터를 사막을 걸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걸었습니다. 그들은 그 60키로라는 끈에 잡혀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 희미한 구원을 희망하면서. 그 희망 속에서 꺼져가고 있을지 모르는 희미한 생명을 부여잡고 있으면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아내가 웃고, 친구들이 웃고, 동료들이 웃으며 말을 걸어 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사막 하늘엔 별들만 총총합니다. 다시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찾던 동료들이 애타게 부릅니다. 그런 반복 속에 자는 둥 마는 둥 하룻밤이 갑니다.
생텍쥐페리가 생명의 구원이란 갸냘픈 희망의 끈에 매여 더는 더 이상 멀리 가지 못하고 돌아오듯이 우리 또한 더는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더는 멀리 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줄에 매여 있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다른 건 다 사라져도 희망만 있으면 세상은 살만하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이 헛된 것이란 걸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고, 희망의 다른 이름은 절망이라는 것을 느낄 때 인생은 참 버겁고 힘겹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잘 가던 길을 멈추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말라 합니다. 종교란 이유, 도덕이란 이유, 양심이란 이유, 친척, 이웃, 친구라는 나 아닌 타인의 시선이 나를 줄로 잡아 끌고 있습니다. 희망이 우리를 구속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살아갈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게 때로 힘에 겹고 슬플 때도 있지만, 그것은 살아 있음의 축복이라고, 놀라운 기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나를 잡고 있는 줄이 있다는 것, 나를 구속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 무엇인가를 의식하며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란 혼자 살아갈 공간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공간이기에 어떤 형태의 구속이든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아침, 그럼에도 한 없이 인간이기를 포기 하지 않으며, 그런 대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게 다행입니다. 다시 돌아와 구원의 희망인 비행기 잔해 옆에 누워서 절망을 씹어 삼키고 있던 생텍쥐페리를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도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끈의 길이를 조정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삶의 비행기의 잔해, 추락당한 비행기의 잔해 옆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 줄의 길이를 늘려야 할까요? 그 길이는 자기 합리화란 길이입니다. 그 길이는 스스로 정한 길이입니다. 그 길이를 적절히 자기 능력에 맞게 조정하여 괴로움이 아닌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