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제905회 - " 사랑으로 살다 사랑으로 죽는다면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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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2
목마른 한 사나이가 샘물을 내려다봅니다. 문득 그 샘 속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 그 모습에 취한 이 남자는 샘 속에 비친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사람에 취하여 샘물로 갑니다. 오직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식음까지 게을리하면서 까지 샘물 속 사람을 사랑하던 이 남나, 점점 야위어 갑니다. 결국 이 남자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의 골자만 정리해보았습니다. 신화는 더 이상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수수께끼만 던져줍니다. 이 문제를 풀어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선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고요.
우물 속 한 사람을 사랑하다 죽은 이 남자, 불행했을까요? 행복했을까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남자는 행복하게 죽었겠지요. 한 사람을 사랑하다 한 사람과의 사랑에 빠져 죽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비록 우물에 비친 사람을 우물 속에 사람으로 착각하여, 결국 자기만을 사랑하는 꼴이 되었다고는 해도, 끝까지 깨달음이 없이 사랑에 살다 사랑에 빠져 사랑으로 죽었으니 행복하지 않았겠어요.
물론 대부분은 진정한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이 남나를 불행한 남자, 자기만을 사랑한 남자로 불쌍하게 여깁니다. 이 신화를 나르키소스의 신화라고 합니다. 그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유아와 같은 미숙한 사람, 그런 불행한 사람들을 가리켜 나르시즘이라고 하고요.
진정한 나를 모르고 살았던 이 남자, 우물 속에 비친 사람을 자신이 아닌 남으로 알았던 이 남자는 행복하게 죽었을까요? 불행하게 죽었을까요?
나르키소스를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행복한 나르키소스일까 불행한 나르키소스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내일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요.
나르키소스,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던 이 남자,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다른 그 무엇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즐거운 일은 우물 속의 남자를 사랑하는 일입니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을 발견했으니, 그 사람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내가 웃으면 웃어주는 사람,
내가 슬프면 같이 슬퍼하는 사람
내가 아름다우면 같이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한 이 남자, 끝내 그 사람을 사랑하다 그 사람과의 사랑 속에 빠져 죽었으니 그는 진정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그가 끝까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지 속에 죽었다면 그는 행복하게 살다 행복하게 죽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결과만으로 판단하지만, 행복의 문제는 그 사람 자신만의 것입니다. 그렇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끝까지 살 수만 있다면, 그건 행복한 일입니다. 그 이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단지 인식의 문제 앎의 문제일 뿐입니다.
무지로 살다가 무지에 빠져 무지한 상태로 죽을 수 있다면 스스로는 행복합니다. 그거면 됩니다.
다만 우리는 모두 앎에 노출되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해서 오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른 이야기는 내일 하자고요. 무지, 때로 무지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요. 고로 상대가 누구건 사랑에 빠져 살다 사랑으로 죽은 나르키소스는 행복한 사람이라고요. 사랑하세요. 사랑이 당신을 무척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당신을 빠져들게 하는 그 사람을요. 그리고 그 미망에서 깨어나지 마세요. 행복은 앎에 있는 게 아니라 무지할지라도 행복에 젖어 있는 그 순간에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든 당신 자신을 사랑하든 누군가를 사랑하든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건 당연합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의 골자만 정리해보았습니다. 신화는 더 이상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수수께끼만 던져줍니다. 이 문제를 풀어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선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고요.
우물 속 한 사람을 사랑하다 죽은 이 남자, 불행했을까요? 행복했을까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남자는 행복하게 죽었겠지요. 한 사람을 사랑하다 한 사람과의 사랑에 빠져 죽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비록 우물에 비친 사람을 우물 속에 사람으로 착각하여, 결국 자기만을 사랑하는 꼴이 되었다고는 해도, 끝까지 깨달음이 없이 사랑에 살다 사랑에 빠져 사랑으로 죽었으니 행복하지 않았겠어요.
물론 대부분은 진정한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이 남나를 불행한 남자, 자기만을 사랑한 남자로 불쌍하게 여깁니다. 이 신화를 나르키소스의 신화라고 합니다. 그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유아와 같은 미숙한 사람, 그런 불행한 사람들을 가리켜 나르시즘이라고 하고요.
진정한 나를 모르고 살았던 이 남자, 우물 속에 비친 사람을 자신이 아닌 남으로 알았던 이 남자는 행복하게 죽었을까요? 불행하게 죽었을까요?
나르키소스를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행복한 나르키소스일까 불행한 나르키소스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내일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요.
나르키소스,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던 이 남자,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다른 그 무엇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즐거운 일은 우물 속의 남자를 사랑하는 일입니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을 발견했으니, 그 사람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내가 웃으면 웃어주는 사람,
내가 슬프면 같이 슬퍼하는 사람
내가 아름다우면 같이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한 이 남자, 끝내 그 사람을 사랑하다 그 사람과의 사랑 속에 빠져 죽었으니 그는 진정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그가 끝까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지 속에 죽었다면 그는 행복하게 살다 행복하게 죽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결과만으로 판단하지만, 행복의 문제는 그 사람 자신만의 것입니다. 그렇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끝까지 살 수만 있다면, 그건 행복한 일입니다. 그 이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단지 인식의 문제 앎의 문제일 뿐입니다.
무지로 살다가 무지에 빠져 무지한 상태로 죽을 수 있다면 스스로는 행복합니다. 그거면 됩니다.
다만 우리는 모두 앎에 노출되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해서 오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른 이야기는 내일 하자고요. 무지, 때로 무지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요. 고로 상대가 누구건 사랑에 빠져 살다 사랑으로 죽은 나르키소스는 행복한 사람이라고요. 사랑하세요. 사랑이 당신을 무척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당신을 빠져들게 하는 그 사람을요. 그리고 그 미망에서 깨어나지 마세요. 행복은 앎에 있는 게 아니라 무지할지라도 행복에 젖어 있는 그 순간에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든 당신 자신을 사랑하든 누군가를 사랑하든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건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