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제908회 - " 드림과 비전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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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2
드림과 비전,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울까요? 물론 드림입니다. 드림이든 비전이든 우리는 같은 말, 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하면 드림과 비전은 다릅니다. 드림은 잠을 자면서 꾸는 꿈에 가깝고, 비전은 장래에 이루고 싶은 꿈에 가깝습니다. 드림과 비전, 이중 드림은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에게 자주 찾아옵니다. 뭔가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 쌓여 있을 때 꿈을 꿉니다. 그것이 심하면 잠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꿈은 많이 꿀 수록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잠을 자면서 꿈을 꾸기보다는 생각하면서 꾸는 비전이 좋습니다.
성경에서 꿈을 잘 꾸는 사람하면 우리는 요셉을 떠올립니다. 요셉은 같은 꿈을 되풀이합니다. 그 꿈을 해석하니 형제들과 아버지가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입니다. 이를테면 추수를 했는데, 자신이 짚단은 가운데에 있고, 나머지 형제들의 짚단은 그의 짚단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짚단들이 그의 짚단을 향해 절을 하더랍니다. 그 꿈을 해석한 즉, 그의 형들이 그를 향해 절을 하는 꿈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엔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꿈을 때로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꿈은 계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찜찜한 꿈을 꾸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고, 돼지꿈이라든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꿈을 꾸면 기대에 부풉니다. 그러면 복권을 사거나 뭔가를 시작합니다. 이성이 잠든 상태에서 꾸는 것이지만, 그것을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과 연결지어 생각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정신에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꿈이든 저런 꿈이든 이처럼 꿈을 많이 꾸는 날은 많은 생각을 가져다 줍니다. 꿈을 현실과 연결짓거나, 꿈을 현실의 반영이라거나 꿈이 일어날 일의 암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꿈은 차라리 안 꾸는 것이 편합니다.
이 꿈, 체험한 적은 없지만 자주 같은 꿈을 꾸면, 아니 이미지가 유사한 꿈을 자주 꾸면 그 꿈은 앞날의 예시 같은 걸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 꿈을 만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꿈은 드림이면서 비전입니다. 자신이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닌 인생의 목표로 삼은 꿈, 즉 비전과 자면서 자주 꾸는 유사한 꿈이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전이자 드림이며, 드림이자 비전입니다. 하긴 꿈을 꾸는 것도 나 자신이요, 세상을 사는 것도 나 자신이니까요. 그러니 꿈이라고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꿈도 현실의 반영이며, 현실의 반영이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아들러도 꿈을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단순히 무의식의 발현이라기보다 현실의 반영으로 봅니다. 현실에서의 열등감의 문제가 꿈에 현현되는 것인데, 우리가 단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 해석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과 그 열등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꿈을 꾸든 그 꿈은 나의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나와 연결되어 나의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기호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더구나 유사한 꿈을 자주 꾼다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을 다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꿈은 나의 것인 이상, 나 자신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이상, 깊은 잠이 들지 않았을 때 더 상상한 것이 꿈인 이상, 그 꿈에서 나의 상황의 여러 신호를 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런 경우, 꿈은 하나의 소명으로 인식합니다. 거기 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내가 꾸는 꿈이니 꿈을 생각해 보자고요. 기왕이면 그 꿈을 능동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삶의 방향을 용감하게 설정했으면 합니다. 꿈이나 세상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긍정적으로 나아가면, 그것이 곧 좋은 꿈이요 비전입니다. 꿈을 비전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꿈을 잘 꾸는 사람하면 우리는 요셉을 떠올립니다. 요셉은 같은 꿈을 되풀이합니다. 그 꿈을 해석하니 형제들과 아버지가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입니다. 이를테면 추수를 했는데, 자신이 짚단은 가운데에 있고, 나머지 형제들의 짚단은 그의 짚단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짚단들이 그의 짚단을 향해 절을 하더랍니다. 그 꿈을 해석한 즉, 그의 형들이 그를 향해 절을 하는 꿈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엔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꿈을 때로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꿈은 계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찜찜한 꿈을 꾸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고, 돼지꿈이라든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꿈을 꾸면 기대에 부풉니다. 그러면 복권을 사거나 뭔가를 시작합니다. 이성이 잠든 상태에서 꾸는 것이지만, 그것을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과 연결지어 생각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정신에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꿈이든 저런 꿈이든 이처럼 꿈을 많이 꾸는 날은 많은 생각을 가져다 줍니다. 꿈을 현실과 연결짓거나, 꿈을 현실의 반영이라거나 꿈이 일어날 일의 암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꿈은 차라리 안 꾸는 것이 편합니다.
이 꿈, 체험한 적은 없지만 자주 같은 꿈을 꾸면, 아니 이미지가 유사한 꿈을 자주 꾸면 그 꿈은 앞날의 예시 같은 걸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 꿈을 만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꿈은 드림이면서 비전입니다. 자신이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닌 인생의 목표로 삼은 꿈, 즉 비전과 자면서 자주 꾸는 유사한 꿈이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전이자 드림이며, 드림이자 비전입니다. 하긴 꿈을 꾸는 것도 나 자신이요, 세상을 사는 것도 나 자신이니까요. 그러니 꿈이라고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꿈도 현실의 반영이며, 현실의 반영이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아들러도 꿈을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단순히 무의식의 발현이라기보다 현실의 반영으로 봅니다. 현실에서의 열등감의 문제가 꿈에 현현되는 것인데, 우리가 단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 해석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과 그 열등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꿈을 꾸든 그 꿈은 나의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나와 연결되어 나의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기호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더구나 유사한 꿈을 자주 꾼다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을 다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꿈은 나의 것인 이상, 나 자신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이상, 깊은 잠이 들지 않았을 때 더 상상한 것이 꿈인 이상, 그 꿈에서 나의 상황의 여러 신호를 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런 경우, 꿈은 하나의 소명으로 인식합니다. 거기 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내가 꾸는 꿈이니 꿈을 생각해 보자고요. 기왕이면 그 꿈을 능동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삶의 방향을 용감하게 설정했으면 합니다. 꿈이나 세상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긍정적으로 나아가면, 그것이 곧 좋은 꿈이요 비전입니다. 꿈을 비전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