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제916회 - " 팔자 바꾸기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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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2
"그 사람 팔자 고쳤어!"
팔자를 고쳤다, 이 말은 사람은 운명을 고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팔자란 생년월일이라는 4개의 기둥이란 말로 사주,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이르는 8글자를 합쳐 사주팔자라고 합니다. 이 사주팔자에 이미 운명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사주팔자, 즉 정해진 운명을 안고 나온다는 것이니, 태어날 때 잘 태어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팔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결국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잘될 놈은 잘 될 것이고, 못될 놈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팔자를 고쳤다라는 말이 있다면, 결국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운명은 없다고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때문에 운명이 정해져 있다,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며 예언을 해주고, 점을 쳐주는 등 미리 앞일을 알려주는 건 사기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기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지난 일이야 심리를 들여다보아 얼추 알 수 있을 테지만, 미래라는 건 예단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측은 가능합니다. 그것은 운명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이력,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보아서 치밀한 통계에 따른 예측일 뿐입니다.
동물은 자기가 살아온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은 이미 내재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반응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치밀하게 연구한다면,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계산에 넣을 수 있고, 그러한 조건이 일어난다는 전제를 두고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존재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운명을 알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치밀한 통계에 따른 예측일 뿐입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치밀한 경우의 수들의 통계, 입력된 통계로 인한 반응 덕분입니다. 이 치밀한 통계를 활용하면,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예측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예측과 운명을 점치는 일은 다릅니다.
삶의 회로, 치밀한 통계가 내재되어 있어 그대로 반응하는 우리의 스타일, 그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에 지금 만족하다면, 앞으로도 만족할 것 같다면, 지금 그대로 살면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다면, 지금부터 팔자를 고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정해진 회로를 바꿔야 합니다. 삶의 페턴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팔자가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따라서 운명이 있다느니, 정해져 있다느니 단언한다면 그건 대단한 사기입니다. 인간은 소위 운명이라고 하는 허울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제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몫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력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그런데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사기를 치고 있다네."라고 노인은 산타이고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존재에게 주어진 어떤 정해진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고, 결국 운명에 지배당하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야. 터무니없는 소리지." 라고 덧붙입니다. 운명에의 순응, 그건 참 심심한 인생입니다. 수월할 수는 있지만,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 운명이란 놈을 때려눕힐 수 있어야 재미있지 않겠어요.
운명을 믿는 사람은 자아의 신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익숙한 삶대로 무난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의 발전도 없습니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는 여행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은 이런 안일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팔자라고 알고 있는, 운명이라고 믿고 있는 지금의 안일함,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여행입니다. 지금 그 길을 시도하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지금 운명이라고 믿고 있던 허명이, 팔자라고 포기했던 내 삶의 순간들이 운명이 아니었음이, 팔자가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우리 삶에, 아니 우리 정신에 잘 설계된 것처럼 입력되어 있는 관습이나 습관의 삶의 회로들 몇 개를 건드려 바꿔보자고요. 그래서 팔자 한 번 바꾸려 떠나보자고요.
팔자를 고쳤다, 이 말은 사람은 운명을 고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팔자란 생년월일이라는 4개의 기둥이란 말로 사주,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이르는 8글자를 합쳐 사주팔자라고 합니다. 이 사주팔자에 이미 운명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사주팔자, 즉 정해진 운명을 안고 나온다는 것이니, 태어날 때 잘 태어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팔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결국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잘될 놈은 잘 될 것이고, 못될 놈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팔자를 고쳤다라는 말이 있다면, 결국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운명은 없다고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때문에 운명이 정해져 있다,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며 예언을 해주고, 점을 쳐주는 등 미리 앞일을 알려주는 건 사기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기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지난 일이야 심리를 들여다보아 얼추 알 수 있을 테지만, 미래라는 건 예단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측은 가능합니다. 그것은 운명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이력,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보아서 치밀한 통계에 따른 예측일 뿐입니다.
동물은 자기가 살아온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은 이미 내재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반응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치밀하게 연구한다면,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계산에 넣을 수 있고, 그러한 조건이 일어난다는 전제를 두고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존재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운명을 알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치밀한 통계에 따른 예측일 뿐입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치밀한 경우의 수들의 통계, 입력된 통계로 인한 반응 덕분입니다. 이 치밀한 통계를 활용하면,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예측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예측과 운명을 점치는 일은 다릅니다.
삶의 회로, 치밀한 통계가 내재되어 있어 그대로 반응하는 우리의 스타일, 그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에 지금 만족하다면, 앞으로도 만족할 것 같다면, 지금 그대로 살면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다면, 지금부터 팔자를 고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정해진 회로를 바꿔야 합니다. 삶의 페턴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팔자가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따라서 운명이 있다느니, 정해져 있다느니 단언한다면 그건 대단한 사기입니다. 인간은 소위 운명이라고 하는 허울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제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몫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력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그런데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사기를 치고 있다네."라고 노인은 산타이고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존재에게 주어진 어떤 정해진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고, 결국 운명에 지배당하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야. 터무니없는 소리지." 라고 덧붙입니다. 운명에의 순응, 그건 참 심심한 인생입니다. 수월할 수는 있지만,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 운명이란 놈을 때려눕힐 수 있어야 재미있지 않겠어요.
운명을 믿는 사람은 자아의 신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익숙한 삶대로 무난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의 발전도 없습니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는 여행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은 이런 안일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팔자라고 알고 있는, 운명이라고 믿고 있는 지금의 안일함,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여행입니다. 지금 그 길을 시도하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지금 운명이라고 믿고 있던 허명이, 팔자라고 포기했던 내 삶의 순간들이 운명이 아니었음이, 팔자가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우리 삶에, 아니 우리 정신에 잘 설계된 것처럼 입력되어 있는 관습이나 습관의 삶의 회로들 몇 개를 건드려 바꿔보자고요. 그래서 팔자 한 번 바꾸려 떠나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