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지금 여기가 아름다운 이유

영광도서 0 1,334

모두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 아니 다른 곳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어도 여기서는 다릅니다. 웬만한 산이면 볼 수 있는 병꽃, 여기서 보는 병꽃은 색깔이 유난히 곱습니다. 다른 산 철쭉꽃보다 한 달이나 늦게 핀 여기 철쭉꽃은 색깔이 유난스럽게 정열적입니다. 봄내내 보았던 꽃들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꽃들만이 아닙니다. 위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여기서 보는 하늘색은 유난스럽게 곱습니다. 파란색도 아니고 초록색도 아닌 그 중간색이라고나 할까요. 파란 바다에 떠 있는 길다란 얼음덩이처럼 줄줄이 늘어선 흰구름 사이로 드러난 하늘색깔은은은하면서도 청초하고, 해맑으면서도 우수에 젖은 듯합니다. 

 

주변 풍경에 마음이 젖습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영롱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새들의 아침찬가, 소소롭게 일어나 주변을 떠돌며 이마에 맺힌 땀을 살포시 식혀주는 맛깔나는 아침 바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위를 보고 아래를 보아도, 사방으로 열린 멋진 조망, 영실코스의 처마 끝쯤입니다.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의 멋진 풍경을 발 아래로 놓고 성큼 올라서면 만날 수 있는 풍경들과 문득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정겨운 초가집 지붕 위로 걷는 듯, 영실코스의 상층부를 걷습니다. 아래로 보면 저어기 서귀포시내가 평화롭게 아침 기지게를 켭니다. 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완만한 지붕 위를 걷듯이, 휘파람을 불고 싶은 마음으로 가던 길을 갑니다. 이제 전망대로 오릅니다. 노루 한 마리, 아장아장 평화로움을 맘껏 누리다가 낯선 나그네를 관심 있게 바라봅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 그 자리에 있어 달라고 마음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넌지시 보낸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녀석이 그대로 있습니다. 호기심을 가진 듯 바라보는 녀석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갑니다. 5-6미터, 성공입니다. 사진으로 담습니다. 조금 경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듯 대여섯 걸음을 가다가 다시 멈추어 뒤돌아봅니다. 그렇게 서너 번 나에게 멋진 포즈를 취해 준 후, 해맑은 아침 별판으로 노루는 놀러갑니다.

 

전망대에 오릅니다. 사방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올라온 방향으로는 서귀포 시내가 길게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돌면 옹기종기 모여앉은 여러 오름들이 아이의 생명줄인 어머니의 가슴처럼 봉긋봉긋 솟아 있고, 그 사이 사이로 구름이 드나듭니다. 조금 더 시선을 돌리면,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한라산 아랫자락이 초록을 맘껏 뽐냅니다. 거의 몸을 한 바퀴 돌리면, 이쪽에서 볼 수 있는 한라산 정상이 한껏 머리에 아침햇살을 뒤집어쓰고 해맑은 빛을 튕겨냅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요, 멋진 풍경입니다. 눈으로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몸도 느낍니다. 피부를 촉촉하게 감아도는 이슬을 머금은 바람이 젖는 느낌을 줍니다. 몸도 마음도 신이 납니다.

 

한층 몸과 마음의 쉼을 얻고 길을 이으면, 걸음도 날아갈 듯 윗세오름을 향합니다. 걷고 있으나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으로 전망대에서 내려와 다시 갈랫길에 접어들면 걷는지 날아가는지 저절로 몸이 앞으로 주욱죽 나갑니다. 평탄한 길로 걷다가 약간의 경사가 시작되는 그곳, 해발 1700미터쯤에 샘이 목을 축이고 가라고 아침 햇살에 반짝입니다. 물을 머금은 작고 앙증맞은 하얀 야생화는 참 곱기도 합니다. 주변에 작은 풀들엔 이슬이 방울방울 아침햇살을 머금어 은빛 구슬이 되어 아침을 곱게 단장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보석밭 같습니다.

 

거대한 성벽 같은 한라산 정상이 저기 우뚝 멈추어 있습니다. 아니 정상이 나에게 다가오는지, 내가 그리 다가가는지 착각할 만큼 들뜬 마음으로 윗세오름의 경계에 선 대피소로 들어서면 선계에 접어든 신선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바로 신선입니다. 산에 오는 기분, 산에 드는 기분, 산에 오르는 기분, 그렇습니다. 산을 느낄 만큼 되어야 진정한 산이 주는 즐거움에 들어섭니다. 산이 나요 내가 산인 기분, 아름답습니다. 세상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나 또한 아름답습니다. 여기 이대로 서 있는 한, 여기 이대로 앉아 세사을 내려다 보고, 위로 정상을 올려다보며, 산을 느끼는 한 나 역시 아름답습니다. 한껏 나를 즐겁게 하고 기분 좋게 하여 세상에 찌든 나를 씻으며 여기 있으려니 세상 모두 아름답습니다. 안 믿어진다고요. 당신도 한 번 혼자 호젓하니 떠나보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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