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어리목과 장승생악, 시를 품은 나

영광도서 0 1,471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올 때 못 본 그 꽃" 고은 선생의 시처럼 내려갑니다. 하지만 올라온 곳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때문에 올라올 때 못 본 것들을 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본 것들을 다시 본들 좋겠다만 오히려 다시 볼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눈에 담아 마음에 옮겨담은 아름다운 풍경들, 보고 또 봐도 지리하지 않은, 아무리 봐도 좋고 또 좋은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의 풍경이 마음에 어른거립니다. 어른거리는 풍경들을 저 만큼 옆에 두고 다른 길로 하산합니다. 완전한 도를 닦은 것도 아닌데 하산을 시작합니다. 올라올 때는 영실에서, 내려갈 때는 어리목입니다. 올라올 때 다르고 내려갈 때 다른 길, 인생처럼 가지 않은 길로 하산합니다.

 

한라산 정상을 등지고 앉습니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봇짐을 내려놓고 아랫마을을 굽어봅니다. 아무도 없는 대피소, 그저 고요합니다. 평화로워보이지만 갖가지 사연들로 몸살을 앓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랫마을 사람들을 향해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걱정하는 중생들아' 이렇게 읊조리면서 빈 나무의자에 앉아 가방을 엽니다. 풍경에 취하고 새들의 고운 목소리에 취하고 앙증맞은 야생화의 도리짓에 취해 잊었던 고픔을 해결합니다. 그래봐야 삼각김밥 하나에 우유 한 곽이 전부지만, 지상에서 가장 멋진 정찬의 시간이 지금입니다.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저 아랫구름들이 반찬이요, 아스라히 불어가는 바람의 노래와 간간히 들려오는 새들 노래가 입맛을 돋구니, 이보다 아름다운 아침식사가 어디 있겠어요.

 

한 끼 가뿐히 해결하고 정상에서 돌아서서, 정상을 뒤로하고 걷습니다. 머물고 싶지만 하산하려니 앞에 열린 세상 또한 아름답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듯한 오름들이 사이 사이 구름을 머금고 신묘한 풍경을 빚어냅니다. 여기가 선경인가 싶었는데, 운해가 사이 사이 흐르는 저 아랫마을이 신선들이 사는 마을 같습니다. 사람들이 간간히 올라옵니다. 내가 하산을 시작하는 이 시간, 어리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여기쯤 올라올 시간인 듯합니다. 한 사람도 없더니 이제 사람들이 풍경의 일부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아직 사방으로 열린 어리목코스, 여기가 만세동산이군요.

 

만세동산에 오르면 사방으로 세상이 열립니다. 앞뒤좌우 어디를 보나 성겨의 에덴이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요, 볼테르의 캉디드가 만난 엘도라도입니다. 사방을 둘러봅니다. 좌를 봐도 우를 봐도 뒤돌아서도 앞을 봐도 사방으로 열린 모든 곳이 아름답습니다. 아쉽지만, 떠나기 싫지만 내리막길, 완만하게 펼쳐진 고운 하산길로 도를 터득한 나그네마냥 터덜터덜 아래로 걷습니다. 간간히 지나가는 이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기억에 없는 새로운 사람들이지만 지나치는 이들 모두 정겹습니다. 쳔년지기처럼 미소띈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오르는 이는 오르고 나는 내려갑니다.

 

이쯤에서 열린 공간을 벗어나 호젓한 길로 접어듭니다. 하늘이 언뜻언뜻 나를 닫습니다. 더 이상은 먼 세상이 없습니다. 온통 초록에 둘러싸인 호젓한 숲속입니다. 세상은 나를 닫지만 여기 또한 엘도라도입니다. 간혹 눈에 띄는 아름다운 야생화, 이끼와 줄기식물 그리고 나무가 공존하는 모습들, 아주 밝지도 않고 아주 어둡지도 않은 적당한 분위기의 야생의 숲, 그럴 듯한 시인이 되어 마음으로 시를 잦으며 길을 걷습니다. 점점 더 마주치는 이들이 늘어나는 만큼 명상은 방해 받지만 여기서는 사람들마저 풍경의 일부입니다. 애써 오르는 이들이 묻습니다. 정상이 멀었느냐고. 잠시 뜸을 들이며 전할 말, 배려의 말을 생각합니다. 그래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어리목 대피소가 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땀이 흠씬 젖은 이들이 묻습니다. 정상이 멀었느냐고, 빙그레 웃습니다. 이제 막 시작인데 정상을 물으니요. 뜸을 들여 좋을 말을 찾아 전합니다. 거리는 제법 있지만 숲길은 조금 경사라서 힘이 들지만, 거기만 빠져나가면 하늘을 뻥뚫려서 아름답다고, 그쯤에서 거리가 제법 되지만, 거기서부터는 경사가 완만해서 신나게 걸어도 된다고. 그 말에 힘을 얻은 이들이 옆사람과 그것보라는 듯 용기를 내서, 힘을 내서 오름을 시작합니다. 나의 길은 멀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나의 길은 이제 가깝습니다.

 

어리목에 오니 아직 이른 오전입니다. 그냥 가기 아쉬워 장승생악으로 오릅니다. 왕복 2키로밖에 안되지만, 오는 길 가는 길, 원시림을 느낍니다. 그뿐인가요. 장승생악 정상에 서면 친근한 바람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의 땀방울들을 식혀서 떨구어줍니다. 게다가 한라산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있습니다. 한라산 정상이 구름 옷을, 실루엣처럼, 속이 비출 듯 말 듯한 얇은 속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풍경을 그윽하게 빚어냅니다. 아, 아, 이제는 떠나야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세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길게 느껴지지 않은 한라산 산행을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나  돌아갑니다.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가끔 힘겨울 때, 네게 힘을 주겠지요. 아름다운 풍경들이, 풍경을 마주한 이 고운 순간들이. 고운 시간들, 아름다운 기억들, 나 사는 동안 삶의 용기를, 희망을 주겠지요. 세상을 그대로 있으나 내가 세상을 해석합니다. 내가 해석하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내 안의 세상을 아름답습니다. 내 안의 세상이 아름다우니, 내 밖의 세상 덩달아 아름답습니다. 어떤 풍경이든 내 안의 내가 만듭니다. 나 돌아갑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 살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아름다운, 고운 기억들 가득 채운 내가. 부러운가요? 부러우면 지는 거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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