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불암산에서 느낀 산맛

영광도서 0 1,461

산에 들면 힘듭니다. 특히 요즘처럼 습도가 높은 여름이면 산에 오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추운 겨울에 산행을 할 때보다 서너 배는 족히 힘든 것 같습니다. 때문에 여름엔 산행거리를 비교적 짧게 잡아 산행합니다. 천천히 호흡이 가파르지 않을 만큼 쉽게 산행을 합니다. 힘이 들든 들지 않든 산행은 일상의 공간을 벗어난 덕분에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일상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감각만 살아 있는데, 산에 들면 감각이 서로 넘나듭니다. 촉각이 시각으로, 청각이 시각으로, 후각이 청각으로 자유자재로 넘나듭니다.

 

시원한 촉각으로 들어온 바람은 시원한 맛의 미각으로 변하기도 하고, 맑고 영롱한 새들의 노래는 눈 앞에 아주 멋진 교향곡의 악보로 아른거리면서, 초록 숲 어딘가에 숨은 귀엽게 생긴 산새들의 모습이 그림으로 다가옵니다. 색깔이 소리로 변하고, 피부에 와 닿는  촉감이 신선한 맛으로 느껴지는가 하면 아스라니 소리로 바뀌어 고운 음악으로 변주를 하기도 합니다. 맘껏 상상할 수 있고,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는 산행, 여름 산행은 나름 달콤하고 신선합니다. 줄줄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그렇게 철학적일 수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상행해야 하는데, 시간이 나지 않는 지난주엔 저녁 강의를 가기 전에 불암산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작그마한 산이지만, 산이 갖춰야 할, 아니 명산이 갖춰야 할 요소들은 고루 갖춘 산입니다. 산책로처럼 걷기 좋은 구간, 약간 스릴을 느낄 수 있는 바윗길 구간, 숨을 헐떡일 만큼 가파른 구간,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정상, 사람들이 지겹도록 모여 사는 아파트 대단지를 내려다보며 인간아 인간아를 외치기에 좋은 전망좋은 곳도 있습니다. 명산의 종합판이라 할 작은 산, 정상까지 왕복 7키로 남짓 잡아서 산행하면 되니까 체력적으로도, 시간으로도 부담이 없습니다.

 

 모처럼 여유 있게 전과 달리 산행을 합니다. 전날 고전 읽기에서 이름도 긴 소설가, 포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노름꾼>을 가지고, 회원들이 토론하고 남은 시간 강의를 했는데, 그 녹음한 것을 다운 받아 듣기로 했습니다. 평소에는 자연의 소리만 들었는데, 귀에 이어폰을 끼고 그 음성파일을 들었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를 듣기, 내가 나의 강의 내용 듣기를 하면 새삼스럽습니다. 고질적인 말버릇은 없는지, 무엇이 어색한지, 여러 짚을 만한 것들을 알아 보기 위해 가끔 점검을 합니다. 객관적으로 나의 강의를 판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침 혼자 산행은 그럴 여유가 있어 좋습니다.

 

집에서 출발하면서 듣기 시작한 녹음파일, 산 중턱에 오를 때쯤 끝이 납니다. 이어폰을 뽑습니다. 드디어 산의 소리들이 들어옵니다. 아니 산의 소리들이 들어오기 전에 나의 소리가 먼저 들어옵니다. 나의 숨소리입니다. 전에는 못 느낀 나의 숨소리가 이어폰에서 나오던 소리를 대신합니다. 그게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 숨소리마저 음악 같습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다가 간헐적으로 거칠어지는 숨소리, 악보로 적으면 명곡이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해 봅니다. 나의 숨소리가 이렇게 영감 어린 음악일 줄은 이제야 알아 듣습니다. 이런 걸 득음이라고 하나요.

 

다음엔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 아니 내  안의 소리가 아니라 나와 세상이 만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 발바닥이 접촉하면서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예술처럼 들려옵니다. 내 발바닥에 눌려 아파하는 소리, 바스러지는 소리, 긁히는 소리, 미끄러지는 소리, 자분자분거리는 소리, 찢어지는 듯한 마찰음, 다양한 음들이 변조를 시도하면서 고요한 적막을 깨고 내 귀에까지 기어올라옵니다. 그뿐인가요. 팔을 스치며 스르럭거리는 나뭇잎들의 속삭임도 음악처럼 들려옵니다. 산새들의 노래, 풀벌레들의 여름소리는 그제야 시작입니다.

 

산은 눈으로 보고 느낌을 얻는 것이 거의 전부다 싶었는데, 이날은 산을 귀로 느꼈습니다. 귀로 들었습니다. 귀로 보았습니다. 귀로 맛보았습니다. 때로 여유 있는 산행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배웠습니다. 점차 산을 오감 모두를 동원하여, 오감 모두 다르게 느끼기도 하고 공감각으로 조화롭게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정상에서 역시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걱정하는 중생들아!" 한 마디 하고 내려올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산, 산에서는 특정한 감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감각들이 넘나들어 좋습니다. 오감이 서로 교감합니다. 오감이 서로 교차합니다. 감각이 공감각이 되었다가, 공감각이 모두 미각으로 변합니다. 모든 게 맛으로 변합니다. 모든 소리가 맛이  있고, 모든 촉감이 맛이 있고, 모든 냄새도 맛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산 맛입니다. 산 맛 보러 한 번 오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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