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연꽃 향을 훔쳐가는 바람처럼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나알좀 보소오 동지섯달 꽃 본 듯이 날좀 보소" 문득 이 노래가 떠오릅니다. 눈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마음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어떤 색이라고 딱 정의내리기 어려울 만큼, 고운 색깔에, 어느 꽃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모두가 아름다운 꽃들에, 어떤 향이라고 표현할 알맞은 말이 없는 은근한 향에, 무심코 멈추어 무념무상에 빠져듭니다. 살며시 부추기는 바람 따라 가만가만 몸짓으로 은근한 춤사위로 유혹하는 수많은 연꽃들이 서로 '날 좀 보소'라고 속살거리는 듯하여 눈 둘 곳을, 마음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7월이 나를 부른 걸까요, 연꽃들이 나를 부른 걸까요. 해마다 이맘때쯤엔 덕진 공원 연꽃들이 볼만한데 마침 전북혁신도시에 강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오전에 강의를 마치면 오후에 연꽃 구경을 하리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해마다 이맘때 구경했던 터라 덕진연못으로 가는 마음엔 미리 설렘이 일었습니다. 소리 없는 설렘이었겠지요.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연꽃의 모습이며, 자태며, 색깔이며, 향처럼 마음도 그리 닮았겠지요. 7월의 절반이 넘어가는 즈음에 운 좋게 덕진공원 연꽃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말이 연못이지 호수입니다. 지난해에 정비를 하여 절반은 빈 연못이요. 절반은 연꽃 그득한 연꽃세상입니다. 야멸차게도 빈 연못에는 눈길 한 번 휑하니 던지고, 오후 내내 연꽃세상에만 내 시선을 줍니다. 뭐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연꽃, 봉곳하니 막 피어나는 연분홍 아가씨인 듯, 매력이 넘치는 끼 있는 여인인 듯, 세상을 살만큼 살아서 거칠 것 없는 농염한 여인인 듯, 은근한 유혹을 보내는 듯한 끼와 자태에 눈 둘 곳을 모릅니다. 마치 서로가 날 좀 보아달라 하는 듯한 아름다움에 선택을 못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합니다.
연꽃 세상 중간에 정자 하나 있습니다. 햇살이 너무 강렬하여, 후덥지근한 날씨에 견딜 자신이 없어 거기에 머뭅니다.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카메라에 담기를 보류하고 눈으로 감상하며 마음으로 감상하며 거기 멈추어 섭니다. 바람도 내 마음을 닮았는지 은근히 가만 불어오다가 어느 순간 숨을 멎은 듯 기척이 없습니다. 너무 무더워 바람을 기다리는 건지, 바람이 훔쳐가는 향을 기다리는 건지 연꽃의 미동을, 살살 부는 바람을 기다립니다. 문득 살아오는 바람, 거기서 느낍니다. 연꽃의 은근한 향을. 연꽃 몰래 훔쳐가는 바람에게서 조금 그 향을 훔칩니다. 훔쳐서 맞는 연꽃 향기의 맛, 그 맛 아실런지요?
저 색깔은 무슨 색깔이래요? 연분홍인가, 보랏빛인가, 도통 무슨 색이다 정의 내릴 수가 없네요. 아무튼 저 색은 너무 고와요. 연꽃을 보노라면, 굴뚝에서 몽글몽글 소리 없이 피어나는 저녁 밥 짓는 연기처럼 왜 지난 일들이 그리움의 그림을 그려내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의 그림과 실제가 만나는 연꽃 세상, 내가 있습니다. 아니 나는 없습니다. 여기서니 압니다. 색즉시공 색즉시공의 의미를 알겠습니다. 여기서는 연꽃들이 동작 없는 춤을 춥니다. 소리 없는 노래를 부릅니다. 향기 없는 향을 풍깁니다. 그 무언의 세계, 무색무취의 세계를 미동의 바람이 일다가 잦아듭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곳, 아니 모든 것이 은근한 삶을 얻는 곳에서 나를 발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햇살을 투과시키는 연꽃들의 꽃잎 하나 하나, 연꽃 향기를 훔쳐가는 조심스러운 바람 한 점 한 점, 짙은 초록의 잎새들 위로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는 수많은 연꽃들의 얼굴들, 모두가 하나인 듯, 하나로 햡쳐지는 듯합니다. 나 역시 거기에 합류된 듯한 순간, 이때를 니르바나라 하나요? 눈 둘 곳을 몰라 헤매다 모두에게 눈길을 줍니다. 마음 둘 곳을 몰라 헤메다 모두에게 마음을 줍니다. 아리송한 마음을 모르겠걸랑, 이 글이 아리송하걸랑, 지금쯤에도 한창일 연꽃 세상 한가운데 그 정자에 서서 눈을 감고 바람이 훔쳐가는 연꽃 향기 한 모금 훔쳐 마셔보시지요.
물 흐린 연못에 발을 담그고도 어쩜 저리도 고운 꽃을 피웠을까요? 투명하도록 깨끗한 이슬에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해맑은 햇살을 안아들인 멜랑꼴리한 미소가 야하게 아름다워요. 야한 듯 순수한, 강렬한 듯 부드러운, 유혹하는 듯 수줍은 살그마니 고개 숙인 모습이 슬프도록 신비로워요. 있는 듯 없는 듯한 은은한 향에 취한 바람마저 길을 잃고 사르랑사르랑 연못 안에 갇혀 헤매면 명랑한 듯 부끄러움 타는 소녀 같은 미소를 지닌 은근한 그리움은 연꽃마다 수줍은 듯 살아나요. 내 마음은 연못을 맴도는 바람처럼 그리움에 젖어 헤매지요. 연꽃 세상에 가서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고은 선생의 시 한 줄 제대로 느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