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새로운 아름다움의 발견
너희들은 아름다워. 하지만 너희들은 비어 있어. 아무도 너희들을 위해 죽을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나의 꽃인 내 장미도 멋모르는 행인은 너희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내겐 그 꽃 하나만으로도 너희들 전부보다 더 소중해."
작은 별에 살던 어린왕자가 지구에 와서 한 곳에 잔뜩 피어 있는 장미들을 만납니다. 그 순간 억울하단 생각을 합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던 장미가 수천 송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얼마나 그 한 꽃에 시달림을 받았던지요. 그게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풀밭에 업드려 울었다니까요. 그랬던 어린왕자가 지금은 자신의 장미 한 송이의 진가를 알았군요. 새로운 꽃들보다 자신의 꽃 한 송이가 더 아름답다는 걸, 더 가치 있다는 걸.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마음까지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세요. 얼마나 기쁠까요! 비단 나와 어떤 관계, 이를테면 친구든 동반자든 선후배든 그냥 평범한 관계를 맺고 지냈는데 어느 순간 남다른 진가를 발견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 없이 소중하고, 참 다행이다, 참 행운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만 신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야 신선하고, 뭔가 다른 사람을 만나야만 신선한 게 아니라, 진정 신선한 것, 새로운 것은 지금 옆에 길들인 관계 속에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밑도끝도 없이 무슨 이야기냐고요. 지난주에 남덕유산에 다녀왔거든요. 해마다 이맘때면 그 산에 갑니다. 그 산에 아름다운 꽃들이 야생하고 있거든요. 다른 산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꽃도 있고요. 꽃 이야기 전에 고생한 이야기도 할까요. 전주에 사는 친구들과 거길 갔어요. 영각사에서 출발하여 동봉을 찍고 서봉으로 돌아서 원점회귀 산행으로 잡았어요. 전날 비가 올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그쳤어요. 좋다 생각하고 산행을 시작 화려한 미를 자랑하는 말나리며, 작고 귀여운 별모양의 난장이 바위솔이며, 돌바닥에 바짝 붙어 핀 바위 채송화며, 도도한 미를 자랑하면서 세침떼기를 닮은 솔나리까지 보면서 동봉 정상에 안착했지요.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어요.
동봉 정상에서 준비한 음식으로 이른 점심을 먹었지요. 산 정상에서 먹는 꼬불꼬불한 컵라면, 달달한 믹스 커피의 맛, 게다가 반쯤 얼린 먹걸리 한 잔의 맛, 상상이 가세요? 여기까지도 아주 더 좋았어요. 그런데 몇 번 올 듯 말 듯 몇 방울씩 뿌리던 비가 갑작스레 퍼붓기 시작하는 거예요. 서봉으로 갑니다. 길은 물길로 변합니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비옷으로 완전무장을 합니다. 얼마나 드센 비인지 비옷을 입었음에도 젖어듭니다. 습기가 차서가 아니라 비옷을 뚫고 새어듭니다. 그럼에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서봉에 도착할 때까지 쏟아 부은 비로, 옷은 완전히 젖었습니다. 다행히도 그쯤에 비는 그쳤습니다. 덕분에 서봉에서 옷을 갈아 입고, 야생화 감상에 젖을 수 있었고요.
그 산에서만 볼 수 있었던 꽃들도 만났고요. 우리말로 고상하다라고 표현하기보다 왠지 영어로 노블레스하게 아름답다고 표현해야 어울릴 듯 싶은 솔체, 비를 머금어 의기소침해진 말나리, 빗물에 목욕이라도 흠씬 해서인지 더짙은 노랑을 지랑하는 원추리, 울거나 웃거나 꽃들이란 여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같이 간 친구가 향이 참 좋다고 말합니다. 무슨 향기냐고 내가 묻습니다. 솔나리꽃 향기를 맡아보라는 겁니다. 아! 처음 알았습니다. 향기가 맛이 있다는 걸. 그윽한 건지, 은은한 건지, 딱 이런 향기다 규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고아하고 기분좋게 하는 맛있는 향기라고 표현할밖에요.
이맘때 남덕유산에 있고 싶은 이유는 야생화들 중 솔나리 때문이거든요. 보라색인 듯아닌 듯, 그냥 고상하다 고아하다라고 표현하고 싶은 꽃, 게다가 앙증맞달까, 귀엽달까, 도도하달까, 새침떼기 같은 고아한 자태에 반하게 만들거든요. 한눈에 반하게 만드는 색깔과 자태만 아름다운 줄 았았는데, 향기마저 아름답다니요. 달콤하다 향기롭다, 딱 무엇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향기, 신비에 취하게 만드는 묘한 맛의 향기, 그 꽃은 정말 향기로웠어요. 새롭게 알았지 뭐예요. 겉모습의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향기까지 아름답다니요. 같은 꽃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그게 새로운 아름다운 꽃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기분 좋더라고요.
아마도 분명, 사람도 그렇거예요. 아니 그렇지요.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또는 사람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좋은 점, 새로운 뭔가가 아름다운 점이 있을 거예요. 솔나리가 자태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후각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미각으로 표현하고 싶은 참 좋은 향을 가졌는데 내가 미처 몰랐던 것처럼, 후각이 미각으로 변하는 것처럼, 사람도 그럴 거예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어떤 사람보다 아름다운 거예요. 아름다운 건, 새로운 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 있어요. 새로움이든 아름다움이든 그건 새로운 뭔가에서 찾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것에서 새로 발견하는 것이어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당신에게 나도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