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영봉에서 해돋이를 보면
"아저씨도 알 거예요... 누구나 슬픔에 잠기면 석양을 좋아하게 돤다는 걸......"
어린왕자가 조종사에게 한 말입니다. 슬프면 석양을 좋하는 이유,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분위기를 타는 동물이라 분위기에 젖습니다. 분위기를 따릅니다. 때문에 비가 내리는 풍경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나도 몰래 마음도 비에 젖어 우수를 느끼겠지요. 강물이 흐르는 걸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나도 몰래 마음도 흘러 인생무상을 느끼겠지요.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구름들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나도 몰래 구름따라 어디론든 방황하고 쉽겠지요. 그러니까 무엇을 보느냐가 내 기분을 좌우한다는 말이지요.
문득 해돋이가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에는 해돋이 보려면 쉽지 않습니다. 여름이면 해는 너무 부지런을 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아침 일찍 일어나 제 일을 시작합니다. 하여 이맘때면 아침 여섯 시면 벌써 동산 위로 올라 하룻일을 시작할 준비를 끝냅니다. 그러니 해가 일을 시작하는 순간을 만나려면 여간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그냥 사람 사는 마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산에 올라, 기왕이면 어느 산 정상에 올라 해돋이를 보려면 더더욱 서둘러야 합니다. 알겠지요. 내가 슬퍼서 해돋이를 보고 싶은 건 나이라는 걸. 어린왕자가 말했듯 슬프니까 석양을 보고 싶다고. 그렇다면 해돋이를 보소 싶은 나는 그와는 반대니까 내 마음을 기쁘다는 걸. 내 마음은 아침 태양처럼 둥둥거리면 뛴다는 걸......
해돋이를 보고 싶다는 친구 차로 아침 다섯시에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괜찮은 해동이 명소,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북한산 영봉입니다. 도선사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하고, 거기서 영봉 정상까지는 삼십 분 정도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시간은 빠듯합니다. 겨울과 달리 여름이라 다섯시 조금 넘으니 어둠은 사라지고 회색빛 도시가 훤합니다. 숲속으로 난 도로를 따라 자동차도 서둡니다. 주차장에 도착해 부랴부랴 마음 바쁘게 준비를 마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여섯시까지는 불과 이십 분도 채 없습니다. 어쩜 해돋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서두르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입니다. 다만 골짜기를 벗어나 정상은 아니라도 능선 끄트머리에서라도 해돋이를 맞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바림이 붑니다. 서두른 덕분에, 숨을 할딱인 덕분에 영봉 정상을 오십여 미터 남기는 지점에서 해돋이 전에 부는 바람을 만납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면 꼭 바람이 일거든요.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여명의 신 에오스의 치맛바람이라지요. 정상에 가면 이미 해돋이는 끝날 것 같아 오르는 대신 산 가로 나갑니다. 예상대로 붉은 해가 벌써 동쪽 산 위에 팔을 걸고 오르는 듯 합니다. 붉고 힘찬 덩이, 불덩어리처럼 이글이글 타오릅니다. 가슴이 뜁니다. 막 토해내는 듯한 불덩이, 왜 가슴이 뛰는지 모르지만 뭔가 내 가슴에서도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불덩이든 욕망의 덩이든, 무언가 좋은 무엇이내 안에서 확 빠져나올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 듯한 그런 기분일 겁니다.
해돋이를 봅니다. 아니 해의 용틀임을 봅니다. 분위기에 젖는 나도 용틀임을 합니다. 붉은 해의 용틀임, 오늘 따라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단 말 대신 표현할 말, 아! 황홀합니다. 홍홀하단 말밖에 찾을 수 없습니다. 황홀한 해의 탄생, 해의 떠오름, 해의 용틀임, 이런 저런 망을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올리며 나도 몰래 황홀에 젖습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왕자가 여기 온다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저씨 해돋이를 보러가요. 아저씨도 알게 될 거예요. 누구나 해돋이를 보면 기뻐진다는 걸....." 황홀한 생각을 뒤로 하고 남은 길을 걸어 영봉 정상에 오릅니다.
정상에 올라 좌측으로 돌아섭니다. 와아! 다시 한 번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아무때나 바라보아도 아름답기 그지 없는 인수봉이 웅장한 모습이 앞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주황색입니다. 마치 황금성벽 같습니다. 화면 가득 찬 황홀한 풍경을 텔레비전으로 보는 듯한, 그런 기분 이상입니다. 딱 이 시간, 아직 붉은 햇살이 마구 바위에 부딪쳐 튀어오르는 시간이라야 볼 수 있는 장엄하면서 황홀한 풍경, 다른 말이 필요 없는 황홀함 앞에 기대랄까, 희망이랄까, 알 수 없는 설렘이 마구 솟았습니다. 혼자 보기엔 , 아니 둘이 보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이었습니다.
황홀한 풍경을 보며 어린왕자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저씨 해돋이를 보러가요. 누구나 영봉에서 해 떠오르는 풍경을 바라보면, 그리고 로 돌아 주황빛 물든 인수봉의 모습을 보고 나면 기쁨에 잠길 거예요. 뛰는 가슴을 맘껏 느낄 거예요.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