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가을 바람의 맛을 아시나요?

영광도서 0 1,615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올 때 

 

못 본 그 꽃

 

 

 

고은 선생의 <그 꽃>이란 시입니다. 살면서 잊고 사는 중요한 그 무엇을 시에 담은 것 같습니니다. 혹 살면서 바쁘다는 이유, 힘들다는 이유, 무관심한 이유로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살지는 않느냐는 질문이겠지요. 시의 내용인 즉, 한 번 놓친 것을 다시 챙겨볼 수 있다, 챙겨보아야 한다는 의미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한 번 놓친 것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인생은 반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라갈 때 못 보면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산행은 원점회귀가 가능하지만 삶은 반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라간 굽이길로 다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단선적으로 한 번 지나면 그만이기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은 나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하필이면이든 우연이든 다행이든 그 시간,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그것이 내 체험이요, 내 삶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체험이든 현장이 있습니다. 그 현장에 있어야 진정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말인 즉슨 정말 신선한 가을 바람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가을 산 능선으로 걸어보라는 뜻입니다. 특히 요즘,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려는 시절, 간밤에 비가 내리고 그 다음날 산에 오르면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은 참 맛이 있다는 것, 바람은 참 슬기롭다는 것, 바람은 참 사랑스럽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요즘 산능선에 올라야만 그 맛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이 아니면 이 바람의 맛은 이미 변하고 그냥 밋밋한 바람일 겁니다.  

 

요즘 부는 바람은, 아니 산능선으로 부는 바람은 얼마나 상쾌한지 모릅니다. 후덥지근하지도 않고, 아주 시원하고 깨끗한 물로 세수를 하는 듯  얼굴을 쓰다듬으며 상쾌함을 줍니다. 마치 아주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낭창낭창 감겨드는 느낌입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느낌으로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후덥지근한 여름을 지우고 상쾌한 시절을 안은 바람, 짜증을 지우고 해맑은 미소를 띄운 바람, 상한 자극 대신 기분좋은 감촉을 지닌 바람, 그 바람의 맛을 느끼려면 바로 요즘 산 능선으로 오르면 좋습니다. 바람은 아무데나 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느 곳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런 향을 갖지 못한 바람, 밭에서 퀴퀴한 냄새를 실어온 바람은, 들에서 은은한 야생의 꽃냄새를 묻쳐온 바람은, 숲에서 철따라 다른 냄새들을 바꿔오는 바람은, 온갖 세상의 냄새를 훔쳐 냄새를 만듭니다. 때문에 들바람, 산바람 그리고 도시바람은 냄새자체가 다릅니다.  

 

 아무런 소리를 갖지 못한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지나며 숲소리를 내고, 찌그러진 양철 조각을 지나며 짜증소리를 내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어지러운 세상소리를 내지만, 산사에 매어달린 풍경에 매달려 각성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한번도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바람은 앙상한 겨울나무를 얼구어 아름다운 눈꽃을 보여주고 가을 산을 휘저으며 고운 단풍을 물들여주고 여름의 울창한 숲사이를 떠돌며 초록 춤을 보여주고 봄이면 이 산 저 산 이 들 저 들 옮겨다니며 잠들어 있던 생명들을 깨워 제 모습을 그렇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바람은 향이 없으면서 가장 다양한 향으로, 바람은 소리가 없으면서 수많은 소리들로, 바람은 모습이 없으면서 수많은 모습으로, 가장 역동적이면서 가장 신선한 제 존재를 알립니다. 그러니 아무때 아무데서나 같은 바람이 아닙니다. 거기 그 자리, 바로 그 순간 부는 바람은 부지런해야 느낄 수 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머물러 연두빛 생명을 만들어준 바람, 진녹색의 무성한 성숙을 만들어준  바람, 그 바람이 지금은 색 고운  풍경화를 만들어주려고 산능선으로 친근하게 지나고 있습니다. 그 바람의 맛을 보고 싶어서, 그 바람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 바람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 바람의 향기를 맡고 싶어서, 그 산에 오릅니다. 지금 거기에 있어야 그 느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로 지나는 바람은 나 여기 있으므로 느낄 수 있고  맛볼 수 있습니다. 북한산 정상 백운대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