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도봉산에서 신선놀음

영광도서 0 1,463

올 여름은 짧았습니다.  무척이나 덥다 싶었으나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내리지 않아 애를 태우던 비, 농사를 망치지 않나 싶을 만큼 가물더니, 초여름이 지나자 비가 자주 내렸으니까요. 비 오는 날이 많으니 그닥 덥지 않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지난해에 비해 더운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여름도 짧게 지나가는 느낌이었고요. 비 온 날과 갠 날의 반복, 그럴 때 산에 오르면 특별한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운해를 볼 수 있다거나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해돋이를 볼 수 있다거나 파란 하늘을 수놓은 흰구름들의 묘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비 온 후의 등산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올여름이었습니다.

 

북한산 영봉에서 해돋이를 본 후, 다시 비가 왔습니다. 그 다음날 맑음이었습니다. 시간 내기 어려웠지만 오후 강의인 날 해돋이를 보겠다, 늦으면 운해라도 보겠다, 그 마음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첫버스를 타고 방학동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방학능선을 타고 우이암으로 오르는 코스를 잡았습니다. 우이암에 올랐다가 우이능선을 타고 도봉산 정상 신선대를 돌아오는 정도면 오후 강의를 하는 데 지장이 없겠다는 계산이 충분히 나왔으니까요. 뿌옇게 밝아 온 여명, 산으로 오르는 이들을 간간히 볼 수 있었습니다. 산입구 운동터에는 부지런한 이들이 아침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능선에 접어듭니다. 원통사로 오르는 이 길은 오르락내리락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습니다. 간간히 지나는 이들을  스쳐지나고, 조금 더 들어가니 이제 사람이 없습니다. 혼자 걷는 길, 우이암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중간에 벌써 붉은 노을을 봅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해돋이를 흘려보내는 대신 붉게 물든 구름들의 정취만 만끽합니다. 위험한 길과 안전한 길로 갈라지는 원통사 갈래길, 여기서는 위험한 길을 선택합니다. 바위들이 많은 길입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너무 깨끗한 바윗길, 마치 물청소를방금 끝낸 듯 아주 깨끗합니다. 음식이 떨어져도 주워먹어도 괜찮을 만큼 깨끗합니다. 당연히 그런 길을 걸으려면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마음도 깨끗해지는 듯하다고 하면 솔직히 그건 상투적인 표현이고요.

 

한동안 사람  하나 없는 길을 걸어 우이암 정상, 높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우이암을 가까히 보고, 눈을 들어 서울시내를 내려다봅니다. 아직 덜 깨어난 시내를 보다, 좌로 눈을 돌리면 도봉산 자운봉이 눈을 부비고 일어나 햇살을 가득 안고 있습니다. 시선을 계속 돌려 오봉쪽으로, 다시 상장봉으로 훑으면 이제 북한산 정상 삼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산으로 산으로 중첩된 선들, 산그리메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높든 낮든 정상은 시야를 넓혀주어서, 사방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정상까지 오르려 애쓰는 사람들의 심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날도 드뭅니다. 산행을 하면서 한 사람도 만나지 않고 걷기는 흔치 않습니다. 물론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산을 걸으면 그런 날 더러 있으나 서울을 둘러싼 산들을 걸으며 사람 만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우이암에서 도봉산 정상 신선대까지 오는 동안 사람 하나 스치지 않은 경우는 처음입니다. 비로 목욕한 산도 산이지만  길도 길이지만 바람도 목욕을 한 듯합니다. 낭창낭창 안기는 듯 감기는 듯 아주 묘한 기분을 줍니다. 사랑의 손길인 듯, 안마를 받는 듯, 아니 부드러운 애무를 받는 듯, 그런 기분이랄까요. 신선하고 시원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신선대 정상에 섭니다.  사방을 돌아보는 맛, 안구정화라고 하지요. 그건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만 느낄 겁니다.

 

첫경험입니다. 신선대에서 딱 혼자 이렇게 있는 경험은. 신납니다. 신나니 내가 신이 된 듯합니다. 어디서 아침을 먹지 그런 고민은 어리석습니다. 바로 여깁니다. 신선대 정상에서 아침상을 차립니다. 메뉴야 무슨 상관이겠어요. 바람, 풍경에 기분을 비비면 이보다 더 맛진, 신선한 맛이 어디 있겠어요. 상상은 자유, 착각은 자유라지요. 지금이 신나는 착각에 딱입니다. 내가 바로 컵라면의 맛을 음미하는 산신령입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가부좌하고 폼잡고 아침을 먹으니 내가 산신령입니다. 바로 앞에 자운봉이 내게  고개를 숙여 아침문안인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산행의 아침,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기분, 빗물로 목욕한 깨끗한 초록산을 돌아보는 기분, 파란 하늘을 배경 삼은 흰구름 그림을 감상하는 기분, 온몸으로 신선한 바람의 애무를 느끼는 기분,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이 순간,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이런 기분 아실까요? 여기 이대로 머물면 신선일 텐데, 속세로 내려가면 다시 오염된 사람으로 살아야 할 텐데, 하산을 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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