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그들만의 남한산성

영광도서 0 1,521

서양이나 동양이나 예로부터 성안 사람들, 성밖 사람들로 구분되어 살았습니다. 항상 고생은 성밖 사람들이 더 많이 하고, 더 희생을 했습니다. 반면 성안 사람들은 성밖 사람들의 노고를 희생으로 생활했습니다.  성밖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 있긴 했으나 누가 누구를 정말 보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맨발로 걸은 산, 산은 산이지만 보통 남한산성으로 부릅니다. 하여 산으로 기억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그냥 대강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압니다. 하지만 자동차로 동쪽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 마천역이나 다른 쪽에서 올라가려면 제법 가파릅니다. 그렇게 긴 산행로는 아니라도 산다운 산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산성이 그렇듯이, 어떤 난이나 전쟁 때 사용하기 위하여 건설하는 것이라 산성 대부분은 입지조건이 올라가는 면은 가파릅니다. 그래야 올라오는 적을 위에서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남한산성 역시 그렇습니다. 

 

남한산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의 치욕입니다. 1627년(인조 5년)에 발발한 중국족속과의 전쟁입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우리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그러자 조선은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고 사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합니다. 청 태종 황태극이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합니다. 조선에선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합니다.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습니다.

 

때문에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당시 성 안에는 1만 3천여 명의 군사에다, 양곡 1만 4300여 석과 소금 90여 석으로, 겨우 50일 버틸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성도 아닌 산성은 전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 방어에 유리합니다. 가파른 경사면 위에 성을 쌓기 때문에 공격자는 가파른 곳을 기어오르다 지쳐서 싸움하기 어렵습니다. 병력이 아주 많이 차이가 나야만 공격자가 승리할 수 있겠지요. 때문에 청군은 공격보다는 성을 둘러싸고 장기전을 하겠지요. 조선은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어쨋든 왕이 항복하지 않는 한, 왕이 살아 있는 한, 조선은 아직 나라이므로 버틸 때까지 버티려고 합니다.

 

순수한 백성, 왕을 하늘이 낸 사람으로 알고 있는, 나라의 어버이로 여기는 백성들, 전국에서 구원병들이 출병합니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 당하고 맙니다. 구원병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성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납니다.  청군과 싸우지 말고 항복하지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 사이에 여러 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나다. 이런 저런 결정도 못 내린 채 서로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합니다. 강화도에 피신한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힙니다.

 

이제 남한산성으로 화력을 집중한  청군은 화포를 쏘아댑니다.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합니다. 왕자를 인질로 잡아다 협상 카드로 활용합니다. 1월 26일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합니다.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추면서 전쟁은 끝납니다.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 황태극은 높은 단상에 앉아서 삼궤구고두의 예를 받는 치욕, 그 기억을 간직한 곳이 남한산성입니다. 남한 산성을 걸으며 직접 체험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 때를 생각합니다.

 

왕을 신의 아들쯤으로,  아니면 하늘이 낸 사람으로, 하늘 어버이쯤으로 믿는 백성들, 순진한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왕과 왕의 식솔들, 가신들만 살겠다고 산성으로 피하다니, 나라를 이끄는 이들이 할 짓인지 묻고 싶습니다. 성 밖에선 얼마나 많은 백성이 희생당하고 고통을 당하는지 생각 않고 인질로 잡힌 왕자를 보니 마음이 약해져서 항복을 결정한 것이라면 더 분노를 느낍니다.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달라졌나 모르겠습니다. 공직자들이, 지도자들이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생활하는데, 그걸 생각 안하고 자신들 편의대로, 자신들 주머니 돈 쓰듯, 선심을 쓰는 것은 아닌지, 깊은 생각 없이 끼리끼리 입맛에 맞게 예산편성을 하는 건 아닌지 나는 잘 모릅니다. 지금도 성 안에 사는 사람들과 성 밖에 사는 사람들로 구분되는 건 아니겠지요.  언제쯤 우리는 말로만 애국이 아닌 , 말로만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닌, 정말 어버이 같은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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