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무등산의 황홀한 해돋이

영광도서 0 1,433

풍경이 아름다우면, 너무 아름다우면 흔히 안구정화된다고 하지요. 태초의 하늘이 열리고, 생명이 없는 우주가 열리는 느낌, 마치 천지창조의 순간을 목격하는 느낌, 딱 그랬습니다. 눈길 너머, 즉 산 저만치 너머에서 붉은 불길이 활호라 타오르는 듯, 시야를 막는 벽으로 맞선 산의 윤곽이 불에 타오르는 듯 했습니다. 신의 손 끝과 인간의 손 끝이 살짝 떨어지는 순간을 그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그림이 저 배경일까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천지창조의 지휘자가 된 느낌, 선계에 나 홀로 선 느낌이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이 그랬습니다. 모처럼 광주에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잖아요 금요일 전남공무원교육원에서 시창작 강의를 했습니다. 일부러 오기 어려우니 서울로 상경하지 않고, 광주에서 자고 , 새벽산행을 계획했습니다.  서둘러 올라가도 증심사 무등산 입구에서 정상까지 가려면 대략 두 시간은 잡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요즘은 해돋이가 여섯시 무렵이므로,  아침 세시 반에 일어나서 대략 준비를 하고 네시에는 길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알람을 세시 반에 맞춰놓고 잠을 청했습니다. 잠 드는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알람은 여지없이 울렸습니다.  

 

서둘렀으나 무등산 증심사 입구에 도착하니 네시 십분입니다. 입장을 막는 이는 없습니다. 산객도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 산으로 향합니다. 약시사까지는 신작로이므로, 게다가 점점이 가로등이 있으므로 랜턴 없이 걸어도 괜찮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충분히 숨고르기를 하며 천천히 오릅니다. 약시사를 조금 앞두고 드디어 산길로 접어듭니다. 혼자만의 길, 무등산 전체 속에 혼자인 듯 싶습니다. 자주 가는 산이 아니라 조금은 무섭다만 해돋이를 볼 요량으로 용기를 내어 오릅니다. 서울 같으면 새벽에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더러 있다만, 여기는 없습니다.

 

울창한 숲으로 들어섭니다. 신작로에서와 달리 조금 긴장됩니다. 귀신이 나올까, 사람과 마주칠까, 그런 건 두렵지 않습니다. 야행성인 멧돼지들과 마주칠까 그게 두렵습니다. 놈들이 산에서는 사람과 마주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나 여기 있어  신호만 보내면 되는데  그 도구가 없으니 랜턴 불에 의지합니다. 혼자 야간산행을 할 때는 지팡이로 땅을 짚어대며 걷거나 쇠방울을 달고 방울소리를 내곤 했는데, 준비를 못했으니, 랜턴 불빛을 무기 삼아 전진합니다. 바람도 잠들어 고요만 감도는 숲, 듬직한 사람의 숨소리가 그립습니다.

 

혼자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생각을 끝을 이으며 오르노라니 뭔가 인기척이 난 듯합니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의 소리가 들린 듯한데, 걸음을 멈추고 둘러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이런 때인 가 싶습니다. 서너 번의 그러기를 반복, 뒤를 돌아보는데 불빛입니다. 아이고 놀래라, 누군가의 랜턴 불빛입니다. 중머리재 1키로 남았을까 사람의 불빛이 오륙 미터 뒤에  나타난 겁니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겁나게 반갑기도 합니다. 혼자만 산행하는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따라온 겁니다.

 

인사를 나누고 함께 조금 걷다가 뒤에서 따라온 사람이니 나보다 빠르겠다 싶어 횡하니 가라고 앞세웁니다. 전 같으면 악착같이 지지 않고 오를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걸 보니 나도 나이 들어가나 봅니다. 그러나 많이 앞서 갈 줄 알았는데, 딱 십 미터 쯤 앞서갑니다. 그 거리를 유지하고 가려니까 든든합니다. 중머리재, 잠깐 숨을 고르며 물 한 잔 마십니다. 앞서 온 분도 쉬기에 나도 쉽니다. 조금 기다려도 그 분은 오를 기척이 없어 보입니다. 할 수 없이 적적하지만 혼자 일어섭니다. 중봉으로 오릅니다. 길동무 생겨 좋다 했는데 다시 혼자입니다. 스치는 풀잎들, 다시 긴장합니다.

 

중봉에 다섯시, 정상엔 여섯시에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보조를 맞추어 혼자 걷습니다. 중봉에에 생각보다 좀 늦습니다. 다섯시 이십분,  잠시 숨을 고르고 조금 속도를 냅니다. 중봉에서 정상 아래 평탄한 길까지는 속보로 걷습니다. 그 다음엔 오르막이라 숨고르기를 하며 걸어야 합니다. 먼동이 틉니다. 뿌옇게 밝아올 수록 해돋이를 놓칠까 마음이 급합니다. 서석대를 곁눈질로 훔치고 조금은 숨을 거칠게 만들며 발을 내딛습니다. 드디어 정상,. 정확하게 여섯시입니다. 증심사 통제소에서 정확히 한 시간 오십 분만입니다. 

 

무등산 정상, 혼자입니다. 아무도 없는 무등산 정상, 여기 혼자라는 생각에 기분이 남다릅니다. 마치 인 산의 주인이 된 듯, 산신령이라도 된 듯,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이제까지 없던 선선한 바람이 어둠을 쓸어내면서 불어옵니다.  동쪽 산에선 마치 천지창조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는 기분, 붉은 불이 마구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 아름다운 순간, 마치 세상이 열리려는 순간에 최초의 아담처럼 혼자입니다. 이런 거창한 기분 처음입니다. 십여 분 혼자 있었는데, 인기척, 사람입니다. 아까 만난 그분입니다. 하산한 줄 알았는데, 좀 쉬었다 올라왔나 싶습니다.  다시 두 명의 아담이 무등산 정상을 지킵니다. 

 

화려하면서도 황홀한 해돋이 장면, 눈이 즐겁습니다. 서쪽엔 달이 아직 희미한 빛을 내며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창백하게 죽어갑니다. 타오르며 한 세계가 문을 열고, 퇴색된 세계 하나 소멸되어 갑니다. 거창한 순간에 무등산 정상에 있습니다. 굳이 빨리 하산할 일이 없어서 그대로 머뭅니다. 삼십여 분 그대로 머물며 바람을 맛보고, 풍경을 맛봅니다. 동쪽은 붉게 타오르고 다른 쪽은 안개인가 구름인가 신비로운 기운이 감돕니다. 무등산의 아름다운 아침 풍경을 보며 내가 나를 칭찬합니다. 참 잘했다고. 남다르게 살려면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조금만 더 극성스러우면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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