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무등산의 아침풍경
동쪽엔 태양, 서쪽엔 달, 무등산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습니다. 동쪽하늘은 처음 세계가 열리는 것처럼 붉었습니다. 마치 큰 불이라도 난 듯 하늘이 온통 붉은 물이 들었습니다. 반면 서쪽 하늘은 은은하게 부드러웠습니다. 그 가운데 열식은 달이 하늘 색깔과 같아져서 마치 작은 동전 하나 있는 듯 파란색과 흰색이 중간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동쪽 하늘을 바라보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다, 서로 멋진 대비를 이룬 하늘 아래서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 초록의 초원, 억새이삭들의 나폴거림을 감상했습니다.
이 아침에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붉은 하늘과 색바하늘을 먹금은 대지의 식물들은 신비로운 색깔을 띄고 신묘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시선을 저 멀리 던지면 오목조목하니, 오밀조밀하게 선으로만 구분할 수 있는 산의 윤곽들, 그 사이사이에 희뿌연 구름인지 안개인지 가득 들어차 있거나 반쯤 비어 있거나 송글거리는 낮은 운해들의 아침놀이가 신비스러움을 자아냅니다. 환상 같은 풍경, 그 풍경 하나면 애써 올라온 발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비교적 높은 산 정상을 애써 오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산하기 싫은 마음을 접고 무등산 정상을 떠납니다. 올라올 때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여러 번 보긴 했으나 뿌연 아침에 다시 보는 서석대의 풍경 역시 신비롭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 그 느낌은 아니어도 서석대의 모습은 언제 보든 참 멋있습니다. 서석대를 지나 조금 가파른 지대를 지나면 공원 산책로처럼 편안함을 주는 길로 들어섭니다. 막 피어난 붉은 억새이삭들이 길 양옆으로 경계를 이루며 길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고행자가 고향길을 걷는 그림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아주 곧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곡선도 아닌 사행하는 뱀처럼 부드럽고 우아하게 누운 길, 그 편안하고 아름다운 길, 길 끝 저기, 중봉입니다. 무등산 정상에서 해맞이를 다 하고 내려왔는데, 중봉은 이제 해맞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봉에선 정상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아야 하니까요.
중봉에서 넉넉한 바위에 걸터앉아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아침이랍시고 떡 한 팩을 먹어치웁니다. 떡만 먹겠어요. 신선한 아침바람과 스쳐지나는 안개, 무등산의 아기자기한 정기까지 버무려 먹습니다. 물에다는 무등산 아침 분위기까지 타서 마시는 게지요. 다시 걸음을 천천히 떼어 늦재로 방향을 잡습니다. 가을임에 분명하지만 무등산엔 여기 저기 앙증맞은 자그마한 야생화들이 도리짓을 하며 산객을 반깁니다. 우선 눈에 담습니다. 다음엔 마음에 담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 사진으로 저장합니다. 같은 꽃이지만아침 햇살을 머금은 야생화의 모습은 더 없이 곱습니다.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싸리나무 초록 잎새에, 붉은 억새이삭에 간신히 매달린 이슬방울들이 아침 햇살을 머금어, 상큼한 모습입니다. 꽃보다 아름답게 투명한 방울방울에 햇살을 머금어 무척이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연출해 내고 있습니다. 아침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붉게 하늘을 물들이며 올라온 붉은 해, 지금은 그리 붉지 않고, 열적은 얼굴처럼 빛바랜 모습이지만, 두루두루 햇살을 뿌려주면서 세상을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으로 꾸며주고 있습니다. 혼자 걸으며 아침 찬가를 부릅니다.
아직은 이른 시간, 하산 길엔 야생화를 하나 하나 챙기며 내려갑니다. 아직 산에 오르는 이들이 뜸합니다. 순례자처럼, 도를 깨우치려는 승려처럼 생각에 잠기며 늦재 쪽으로 가다가 바람재로 방향을 잡습니다. 바람재에 내려서면 산 허리를 허리띠처럼 길게 두른 신작로가 길을 가릅니다. 원효사에서 중머리재로 길게 연결하는 숲길입니다. 가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걷고 걷고 싶은 길입니다. 바람재, 그냥 내려갈까 하다가 한 번도 안 가 본 길로 코스를 잡습니다. 골짝기로 하산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가다 죄측 길로 내려가면 증심사통제소 방향일 듯 싶습니다.
생각보다 길게 능선길로 이어집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장군봉을 지나 향로봉에서 하산하는 길이더군요.
생각보다 깁니다. 그래도 하산 길이니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습니다. 능선으로 능선으로 이어지다 내리막으로 내려오니, 미술관쯤입니다. 큰길로 빠져나가려니 우측 길이 궁금합니다. 다시 우측으로 작은 고개를 넘습니다. 편백나무 숲입니다. 여기 편백나무 숲, 멋진 숲이 있는 줄을 몰랐는데 하늘을 찌를듯한 편백나무들이 저들끼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이루고 있습니다. 숲을 지나면서 저수지가 있습니다. 저수지를 따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바로 버스정류장입니다.
하산 완료, 버스정류장에 오니 먼 바다로 출항하는 배들처럼 등산을 준비하는 이들, 막 출발하는 이들, 버스에서 내리는 이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이제 무등산에서 붉은 하늘, 아침 색깔을 머금은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들, 고운 햇살을 품은 야생화의 교교한 폼새를 볼 수 없습니다. 아침풍경을 사랑하여, 무거운 잠을 들어올리고, 부지런을 떨어 경건한 마음으로 이른 아침을 맞을 줄 아는 사람, 찬찬히 아침풍경을 챙기는 사람에게 주는 신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은 사람,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 생각하니 참 좋습니다. 아마도 부러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