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국망봉 자연휴양림

영광도서 0 1,573

가을길을 걷습니다. 신로령을 지나 국망봉으로 갑니다. 아직은 여름의 잔재가 많이 남아 여전한 촉록길입니다. 길이라지만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바로 앞을 내려다보아야 무성한 풀섶 아래로 사람들이 다녀서 다져진 바닥, 그때문에 풀이 자라지 않아 길이 된 바닥이 보입니다. 그걸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를 보아도 앞을 보아도 길은 안 보입니다. 그러나 길은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통행이 뜸한 길, 그 길을 걷습니다.  그 길을 걸으려니 긴장이 됩니다. 가파른 길이어서도 아닙니다. 힘이 들어서도 아닙니다. 위험한 바윗길이어서도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길은 비교적 유합니다. 곁으로 보기에 길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풀 우거진 길에 혹여 벌들이 숨어 있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나 그게 겁납니다. 

 

이전에 산불방지를 위해 화금이라고  만든 겁니다. 능선에 선 나무들을 베어내어 멀리서 보면 신작로처럼 보이던 능선길입니다. 그러고 나니 나무들이 자라는 대신 그 자리를 수풀들과 잡목들이 그 자리를 가득 메운 겁니다. 하여 겨울이면 신작로처럼 넓다란 하얀 길로 변하지만, 여름이면 수풀이 우거져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발바닥으로 데뎌 봐야 알 수 있고  수풀 사이로 바로 밑을 빼꼼히 내려다보아야 풀 없는 바닥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보이지 않는 위험한 것들, 긴장하며 어림잡아 길을 갑니다. 그러다 왜앵 소리가 들리면 깜짝 놀랍니다. 벌이야 소리를 낸다치지만 소리 없이 엎드려 있을지도 모르는 징그러운 뱀은 없나 은근히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긴장만 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리라도 어딘가에선 질서가 유지도기도 하듯, 전쟁이 있으면 평화가 있듯, 눈의 각도를 달리하면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그렇게 걷가가 가끔 풀섶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작고 앚증맞은 야생화들이 태풍의 영향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설레발이 춤을 춥니다. 그냥 보기와 달리 줌업하여 보면 작고 앚증맞은 게 아니라 얼마나 매혹적인지, 사람으로 치면 뇌쇄적인 여인 같습니다. 사람의 기를 쫙 빨아들려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는 팜므 파탈이라고나 할까요. 봄만 꽃의 계절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 길을 걷습니다. 능선을 따라 신작로처럼 이어지는 하얀 겨울길을 상상하면서 예쁜 꽃들과 조우하면서 잠시 잠시 긴장을 풉니다. 두려움을 잊습니다. 바쁨 속에서 잠깐 여유를 즐기듯이. 길을 걷다가 제법 공터처럼 넉넉한 수풀 없는 공간, 비상용 엘기장에서 서면 하늘을 바라봅니다. 파란 하늘, 빙두른 울타리 같은 산의 윤곽을 따라 왕국을 이룬 것처럼,  구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쯤에 여럿이 모여 있고, 텅빈 파란 공간을 한참 지나면, 산울  가까이에 또 구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하늘을 완전히 뒤덮인 것이 아니라 마치 국가의 경계를 나누듯 끼리끼리 모여 피운 구름꽃들이 따라  빙하를 부유하는 하얀 얼음덩이들처럼 구름들이 여기 저기 모여 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구월의 하늘입니다.   

 

이제 국망봉입니다. 사방으로 뚫린 정상에 서 세상을 둘러봅니다. 가운데 하늘은 파랗게 비어 있습니다. 멀리 바라보면 비롯하여 높고 낮은 산들이 산울타리를 이루며 여러 모양, 자세히 보면 모두 다른 모양의 하얀 구름들을 떠받치고 있거나, 밀어 올리고 있거나 바라보고 있습니다. 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구름덩이들 아래서 산들이 가을 한낮에 낮잠을 즐기는 듯합니다. 세월을 잊고 나른하게 오랜 잠에 잠긴 듯 합니다. 오르는 길에선 풀벌레들의 구애의 노래가 정겹더니 마냥 고요합니다. 가끔 쇄애액 소리를 내다 말다 간헐적으로 불어가는 바람의 속살거리는 소리뿐, 고요한 한낮입니다.  

 

오르다가 단 두 사람을 만나고는 인적 없는 산, 사방으로 둘러진 산, 그 한가운데 국망봉 정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리를 골라 돗자리를 펴고 우리만의 방을 마련합니다. 어쩌다 실수로 벌써 물든 여러 개의 단풍잎을 안주 삼아, 잎사귀를 흔들어 노래하는 바람 소리를 연주 삼아,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난 파란 하늘을 분위기 삼아 상상의 신로주를 마십니다. 사람의 두런거림, 여기서는 모두 신비의 언어로 자리잡습니다. 에너지를 보충하고 길을 나섭니다. 흠칫 놀라게 만든 살모사와의 조우, 놈과의 기싸움, 놈이 똬리를 풀고 길을 비켜줍니다.  

 

견치봉에까지 걷고 다시 되돌아와 원점으로 하산합니다. 가파른 하산길, 조금은 지루한 하산입니다. 그토록 오래 걸어도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없다면, 그만큼 특징은 없는 산이란 의미입니다. 대신에 아래로 내려오면 계곡은 더 없이 깨긋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휴양림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겠어요. 휴양림엔 제법 여러 사람이 텐트를 치고 있습니다. 모래알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계곡 물에 얼굴을 씻고, 족욕을 하는 것으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여전히 하늘엔 다양한 모양의 하얀 구름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적당한 세기로 불어오는 바람도 신선합니다. 길섶엔 흔하디 흔한 꽃들이라지만 줌업하여 들여다보면 아주 매혹적인, 뇌쇄적인  여인의 속옷 색깔 같은 며느리밑씻개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립니다. 산은 혼자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이처럼 아름다운 앙증맞은 야생화들, 곧거나 굽은 나무들, 게다가 파란 배경에 흰구름들, 기분 좋게 가을을 알려주는 산들바람, 덧붙은 곱게 자리잡은 추억이 보태져서 아름답습니다. 산이 분위기를 즐기는 가을날, 맘껏 산의 분위기를 마시고 더불어 삶의 현장을 향해 시원한 마음으로 휴양림을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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