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설악산에서 받은 선물 해돋이

영광도서 0 1,447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신 아프로디테, 영어로는 비너스라는 여신을 상징하는 별, 은빛으로 찬란하게 동쪽 하늘에서 은근한 아름다움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싶은 샛별의 은빛이 은근히 하늘 속으로 녹아듭니다. 샛별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하늘 한가운데를 은빛 젖줄기로 하늘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듯한 은하수도 어느새 보이지 않습니다. 푸른 연못 같았던 하늘은 이미 은빛입니다. 파란 하늘 가득 담겼던 별들도 벌써 하룻밤 근무를 마치고 잠자러 들어간 듯 하늘이 뿌옇게 비어 있습니다. 더 이상 파란 하늘바다가 아닙니다. 은색 바바도 아닙니다. 은색에 이르지 못한 그냥 뿌연 바다, 조금은 희끄무레한 바다입니다. 별들 모두 사라진 텅빈 하늘입니다.

 

지금 나는 설악산 마등령 맞은편에 있습니다. 노래 가사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처럼 어디를 봐도 볼 것이라곤 별로 없습니다. 그럴 때 알싸한 바람이 붑니다.  알싸한 바람이 싣고 온 것일까요. 어떤 부끄러움이 물들인 걸까요. 어느 순간 동쪽 하늘이 발그레 물듭니다. 비어 있는 듯 뿌연 젖빛으로 차 있는 듯 볼품 없는 하늘, 저 동쪽을 곱게 물들이는 게 있습니다. 부연 자리를 헤집고 발그레한 노을이 동쪽을 메웁니다. 아침 해가 뜨기 전 동쪽 하늘을 물들이는, 발그레한 긴 수평선은 보고 또 봐도 참 곱습니다. 해가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는 신호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는 햇님이 곧 화려하면서도 고귀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신호입니다.

 

사실 해돋이도 아름답지만, 해가 솟아오르기 전에 물든 아침 노을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아침 해는 붉게 타올라 화려하다면, 아침노을은 하려하다기보다 은근한 매력이 있습니다. 길게 수평선처럼 동쪽에 선을 그은 다음, 그 선 밑으로 은은하고 발그레한 색깔을 먼 산 위로 칠해 놓습니다.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대로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만 눈으로 직접 보는 아름다움 그대로를 담아낼 수 없습니다. 고운 색이야, 아름다운 색이야 담아낼 수 있지만, 바라보는 내 마음의 설렘, 당장이라도 질러내고 싶은 울럭거리는 감탄사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색채만 담을 뿐 바라보는 마음을 담아낼 수는 없다고요.

 

이 마음 아시지요. 새벽에 설악산에 오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징크스처럼 비가 오거나 구름이 짙은 날이었드랬지요. 드디어 이제 해돋이를 맞이하려 합니다. 쉽게 찾아오지 않는 기회를 맞이합니다. 공짜는 없지요. 그만큼의 수고가 필요하니까요. 이제 해를 맞이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한껏 아름답게 피어오르던 아침 노을, 아주 붉었던 아침노을이 약간 색깔이 퇴색되었나 싶을 때, 살쌀한 바람, 없던 바람이 입니다. 옷깃을 여미게 만듭니다. 그것도 모자라 가방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게 만듭니다. 아침 해가 솟기 전이면 으례히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갑자기 기온을 떨어뜨리는 바람입니다. 노숙하던 이가 밤새 잘 견디다가 이 바람에 그만 얼어죽기도 한다지요.

 

노을이 곱고 바람이 불어도 해는 쉽게 오르지 않습니다. 뜸을 들이지요. 기다리는 동안 조금은 춥고 지루하니 그리스신화 한토막 들려드리지요. 아침 바람, 그리스신화에서는 이 바람을 에오스의 바람이라고 하지요. 높이 나는 신 히페리온과 빛나는 여신 포이베의 딸 에오스가 일으키는 바람입니다. 물론 에오스의 오라보니가 태양신 헬리오스요, 자매는 달의 신 셀레네입니다. 이들 남매 중제일 먼저 이 세상에 에오스가 옵니다. 오라버니가 태양을 실은 마차를 잘 몰고 오도록 에오스 여신이 길을 엽니다. 치맛자락으로 어둠을 쓸어내며 길을 여는 겁니다. 그 치맛바람이 일어 이렇게 춥습니다. 어둠을 쓸어낸 그 길을 따라 드디어 태양신 헬리오스가 나타납니다.

 

뜬다 뜬다, 올라온다 올라온다, 갑작스런 호들갑,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동쪽으로 향합니다. 사람들의 시선만 바쁜 게 아닙니다. 손들도 바삐 제 일을 찾습니다. 스마트폰도 바쁩니다. 감탄사라도 내어뱉듯 찰칵 찰칵 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깨웁니다. 호들갑 스러운 감탄사에 간혹 묻히기도 하면서 카메라 셔터음도 음악처럼 아침을 상쾌하게 합니다. 스타가 등장하듯 빼꼼히, 부끄러운 듯 빨간 얼굴을 구름 사이로 빼꼼 내밀던 해가 금세 동쪽 하늘에서 쑤욱 빠져 나옵니다. 뒤를 돌아보니 마등령 뒤쪽 산을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볼품 없던 희뿌연 세상을 어느새 에던동산으로 만듭니다. 

 

기다람 뒤에 남는 보람이 있습니다. 삼십여 분의 기다람을 충분히 보상 받은 기분입니다. 게다가 선물을 덤으로 받은 느낌입니다.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들, 손가락에 정성을 묻힙니다. 한 컷 한 컷 잡아둡니다. 기분 마저 잡을 수는 없지만, 나중에 다시 보는 즐거움이 있을 테지요. 눈으로야 마음을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지금의 기분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참 행복합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것, 그래서 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 번거로움을 참아내고, 잠을 이겨내면서, 힘듦을 감내한 보상 아니겠어요.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수고라고 할까, 고생이라고 할까, 때로는 고통이라고도 할 그 무엇을 세상에 내어주고 얻는 보상, 그래서 더 없이 이 순간이 아름답습니다. 그런 내가 좋습니다. 공짜가 아닌 나의 정신이든 수고든 나를 세상에 내어놓고 그 보상을 받으며 살려는 마음가짐의 내가 대견스럽습니다. 이 아침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도 한몫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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