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나의 안 좋은 편견을 깨준 고마운 학생들
사그락사그락 이 소리인 듯도 싶고, 자라락자라락 이 소리인 듯도 싶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볼펜심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들입니다. 조용한 교실, 모든 만물이 숨을 죽인 듯 고요한 가운데 볼펜심들이 종이 위를 열심히 움직입니다. 마치 석잠은 넉넉히 자고 일어난 누에들이 다시 뽕을 먹는 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무 때가 아니라 세상 만물이 잠든 고요한 한밤에 누에들이 뽕을 먹는 소리, 딱 그 소리 같습니다. 들을수록 정겹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고향의 소리를 듣는 듯한 그런 기분입니다.
볼펜심들이 움직이는 소리, 볼펜심과 종이가 만나서 내는 소리가 이렇게 멋진지 미치 몰랐습니다. 지난 화요일 출강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치뤘습니다. 매번 이 시간이면 열심히 입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데,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시험 치는 요령을 알려주고는 감독만 하는 일이라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시험을 보는 학생들은 고심의 시간일 수도 있을 테지만, 한편으론 공부한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니 스스로 뿌듯한 시간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열심히 종이 위를 기어다니며 내는 볼펜 소리를 듣노라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처음은 아니지만 시험 감독을 하는 기분, 그건 시험을 치루는 입장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내가 가르친 내용 중에서 시험을 냅니다. 내가 출제한 시험을 학생들이 치룹니다. 시험감독이지 출제자입니다. 출제자이자 감독, 둘을 겸하여 시험자리를 지키며 저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어떤 마음으로 시험을 치룰까 하고요. 학생들에겐 다소 불편할 수도, 버거울 수도, 다른 시험보다 골치 아플 수도 있습니다. 주관식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공부한 내용 중에서 쓰고 싶은 것 골라 쓰고, 적어도 글의 분량 중 30%는 자신의 생각을 쓰라는 조건입니다. 정확한 정답이 없는 면에서는 부담이 적을 테지요. 그러면서 생각을 해야 하는 면에서는 골치가 좀 아플 수 있습니다. 약간의 긴장, 그게 필요한 시험입니다.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짜내어 글을 써 보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나름대로 그 무엇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답을 쓰게 하고 싶었습니다. 대신에 오픈북을 허용했습니다. 사전에 시험문제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써 올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강의를 충실히 들었다면 필기한 노트가 있을 테니 노트를 참고하면 충분합니다. 그걸 기본으로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면 누구나 풀 수 있는 시험입니다.
예상하기는 한 시간이면 모든 시험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시험 시작 30분이면 답지를 내고 나가는 학생들이 절반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30분이 넘어도 움직임은 없고 볼펜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꼬박 한 시간이 지나서야 시험을 다 치룬 학생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한 시간 두 시간을 주었는데, 그 시간을 거의 다 채운 학생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없이 시험이 끝났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퇴실한 교실에서 주섬주섬 시험지를 챙기노라니, 한 해 농사를 잘 지은 그런 기분, 뿌듯했습니다.
답안지를 잠시 살폈습니다. 형식적으로 쓴 학생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진지하게 답안을 채웠습니다. 답안지 가득 글씨들이 빼곡히 차 있었습니다. 부실한 답안지가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모두 이렇게 열심히 썼으니 성적을 잘 주어야 할 텐데 상대평가를 해야 하니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답안지 아랫부분에 진심어린 마음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대학에 와서 공부하면서 따분했던 시간들, 그 편견을 깨준 과목이 그리스신화였다고, 대학강의 다운 강의였다고, 인문학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접대성 멘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엿보여 뿌듯했습니다.
학생들에게 가졌던 편견을 깼습니다. 교양과목이라 그냥 점수만 따러 오는 걸로 생각했는데, 진지하게 강의를 들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득 채운 내용들, 그 내용 하나 하나 참 열심히 들었구나 열심히 생각했구나, 그 생각을 했습니다. 대견스러웠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맘껏 펼칠 수 있는 학생들이 대견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정말 열심히 강의를 들어주었구나, 그리고 취지에 맞게 답안을 열심히 써서 보답해 주었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의도한 대로 따라주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얼마나 보람을 느꼈겠어요.
생각 없이 사는 학생들, 시간 때우는 학생들, 그런 편견을 가졌는데, 적어도 나의 학생들은 아니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환한 표정으로, 스스로 뿌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감사하는 듯한 표정으로 답안지를 내고 나가던 학생들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잘 따라준 학생들, 그들에게 더 맛있는 지혜를 전달해야겠다, 좋은 지식의 요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그들을 만날 날이 기다려지는 아침입니다. 젊은이들, 요즘 젊은이들 참 쓸만합니다. 나름 생각이 있고, 어른 알아보고, 진지하게 생각할 줄 아는 믿음직합니다. 학생들에 가졌던 편견을 내려놓으니 마음 뿌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