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곱게 물든 가을 나무처럼
참 곱습니다. 가을이 온통 세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저런 일로 복잡하고 답답한데, 가을은 여지 없이 고운 옷으로 완전히 갈아 입습니다. 울긋불긋하다는 표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느 산이건 갈색입니다. 물론 언제나 녹색으로 자리를 지키는 상록수들은 여전히 녹색이지만, 그들마저 약간은 빛을 잃어 조금은 가라앉은 느낌입니다. 나긋나긋한 연초록의 날들, 은은한 초록의 날들, 역동적인 진녹색의 날들을 넘어 화려한 색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차분히 갈앉은 가을색의 날들입니다.
파주 운정역에서 운정행복센터로 걸어가면서 빨간 단풍과 노란 단풍을 만났습니다. 몇 폭의 억새도 만났습니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변색된 가을이 참 고왔습니다. 나무들의 색깔만 고운 게 아니라 하천을 두른 빨간 보도가 길게 뻗은 길, 유선형으로 물길을 따라 굽어 있는 길이 가을의 운치와 잘 어울렸습니다. 어느 곳을 보나 가을이 차 있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디를 보나, 보이건 여름이건 가을이건 별로 다를 바 없는 건물들마저, 아파트들마저도 왠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모두 가을의 분위기, 화려한 듯 하나 갈앉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강의를 오가면서 가을을 만납니다. 때로는 파란 하늘을 배경삼은 화려한 빨간 단풍을 만납니다. 빨갛다고 다 같지는 않습니다. 가만 보면 생김새는 다릅니다. 완전한 불가사리 모양, 조금은 길죽한 모양, 날카로운 각을 한 모양, 크거나 작은 모양, 좀더 세분해 보면 모양이 다릅니다. 색깔도 진하거나 덜 진하거나 빨갛거나 발갛거나, 맑거나 투박하게 붉거나 서로 달라서 지나는 발길을 멈추게 하고, 내 시선을 서로 당깁니다. 요즘은 어디에 가든 이렇게 고운 가을을 만납니다.
가을하면 단풍의 계절, 그렇다고 모두 빨간 것은 아닙니다. 주목을 덜 받지만 노란 잎도 얼마든 있습니다. 물론 은행잎이야 강렬하지는 않지만 빨간 단풍 이상의 시선을 모으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은 나뭇잎들은 나름의 색깔로 제 마지막 모습을 화려하게 보여주려 합니다. 샛노란 은행잎이 있다면, 그 보다 은근히 노란 생강나무 잎도 있지요, 빨갛지도 않고 노랗지도 않은 그 중간쯤을 입은 감나무 잎은 은근히 매력이 있지요. 여러 색의 잎들이 가을을 빛나게 합니다. 먼 산을 보면 무리지어 숲을 채운 갈나무들의 이파리들도 한몫합니다. 가을 분위기를 나름 맞추어 줍니다.
그러하다고, 가을이라고 모든 나무들이 곱게 익은 이파리들을 달고 있는 건 아닙니다. 무엇이 부족하든 이를테면 수분이 부족해서건 온도가 적절하지 않아서건 영양분이 부족해서건 물들다 말고 변색된 나뭇잎들도 많습니다. 어느 지역에 선 나무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거의 같은 장소에 있어도 곱게 익은 이파리들을 자랑하는 나무가 있나 하면, 제대로 물들지 못하고 또르르 말려 낙엽을 준비하는 나무들도 많습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게 식물이겠지요. 어찌 되었든 나무들 각각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가을을 맞고 가을을 떠나 보낼 겁니다.
소양의 고전 그리스신화가 나에게 베풀어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겠지요. 덕분에 지역에 따라 다른 가을을 만납니다. 그 가을을 만나면서, 아니 가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가을이 화려하다 또는 쓸쓸하다 퉁쳐서 생각한다만, 가을을 맞는 나무들은 각자 다릅니다. 제대로 잘 읽어 화려한 잎들도 있지만, 제대로 물들어 보지 못한 채 변색하여 땅으로 낙하할 나뭇잎들도 있습니다. 사람처럼 어떻게 살았느냐는 아니지만 떠나는 모습은 각기 다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가을날, 곱게 물든 잎들, 화려한 잎들도 있고, 그냥 칙칙하니 또르르 말린 잎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그 이파리들에서, 아니 이러 저러한 잎들을 입은 나무들에게서 나의 미래를 가늠해 봅니다. 나의 가을을 비추어 봅니다. 어떤 옷을 입고 나의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잘 준비해야겠지요. 칙칙한 가을이 아니라 화려하지는 않아도 차분히 빛나는, 적어도 추하지 않은 가을을 맞아야겠지요. 지금부터 은은한 색깔을 고르며 준비하며 살아야겠다 싶습니다. 가을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은은한 나뭇잎처럼, 찹 곱다는 아니라도 나를 보는 이들이 곱다 그렇게 표현하는 가을을 준비하며 가을을 걷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