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속까지 빨간 단풍잎들의 빨간 춤

영광도서 0 1,559

과하지도 않는 모자라지도 않는, 넘치지도 않는 부적하지도 않는, 여기 중간쯤을 중용의 지혜라고 합니다. 너무 과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십상이요, 너무 부족하면 내가 참 괴롭습니다. 그래서 좀 적당히, 무슨 일에서건 적당함이 좋은데, 말은 쉬운데 적당하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걸 재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나를 잘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남을 잘 알아야 하니까요.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중용이고 지혜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나약한 사람이란 동물이 홀로 살 수 없으니, 감정도 다른 동물에 비해 무척이나 섬세하고 또한 그 감정에 영향도 많이 받는 게 인간인지라 주변에 영향을 아주 많이 받습니다. 그런 감정을 잘 조절하며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인데,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제로 파주청소년상담복지센터 학부모를 위한 인문학 강의를 마쳤습니다. 이로써 3주간의 강의를 마감하고 돌아왔습니다. 마침 어제 주제가 그리스신화로 읽는 중용이었습니다. 그 적당함의 삶이 무엇인지 나름 그럴듯하게 강의를 한 것 같습니다. 듣는 이들이 아주 초집중해서 들었으니까요. 그뿐인가요. 한 마디 한 마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적었드랬습니다. 교실을 한 바퀴 휘돌아보면서 강의를 하노라면 그 분위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답니다. 말이야 나름대로 만들어 하는 말이지만, 그 말들을 아주 소중한 듯이 받아 적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고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하필 중용이란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넘치지도 않게 모자람직하지도 않게 사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냥 알고만 있는 게 중용이 아니요, 말로만 외치는 게 중용이 아닙니다. 스스로 돌아보아 너무 인색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낭비하지도 말고, 검소하게 사는 게 중용이요. 어떤 불의를 보면 괜한 객기로 자기를 잘 보이기 위해 너무 과하게 나서는 것이 객기라면, 애써 외면한다면 그건 비겁한 일이요,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이럴 때 행동하는 것은 용기라 합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면, 남의 말을 지나치게 하면 험담이요, 남의 그릇됨을 보고도 애써 외면하면 그것이 묵비요, 이때의 중용의 도가 정직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삶의 여러 일들 중에 중간의 길을 가는 것, 중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오만과 자기비하에 비해 겸손입니다.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이걸 안다면 이론으로는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여 중용이란 이것을 알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실천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게,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실천하기, 즉 실천적지혜를 이릅니다. 말고만 있으면 세상도 나도 바뀌지 않으니까요. 말로만 외치면 세상도 나도 아무런 변화도 없으니까요. 이론으로만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실천이 전제되지 않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건 중용이 아닙니다. 그저 빈수레요, 그저 보기 좋은 떡 딱 그 상태에 있는 것일 테지요.

 

내 강의를 듣는 이들이 나에게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리스신화를 강의함에 있어서는타의추종을 불허한다고 말들합니다. 일단 재미있다, 유용하다, 뿐만 아니라 깊이가 있다고 합니다. 덧붙여서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강의가 아니라 울림이 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여러 곳에 다니며 말도 참 많이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랑을 스스럼 없이 하는 것고 좀 과함에 속한다면 나는 중용에 있지 못합니다. 때로는 자기과시도 필요하지요. 그렇지 못하고 늘 나는 못난 놈이야, 나는 늘 부족해 하면 그건 자기비하로 우선 나부터 살맛이 안 나잖아요. 이도 중용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과시와 자기비하 사이에서 적당함을 갖춘 겸손이 최상입니다.

 

강이를 하면서 많은 이들의 칭찬을 듣습니다. 들으면서 그럼에도 늘 겸손하려 노력합니다. 항상 공부하기도 하고요. 늘 같은 자세를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려면 그 중용이 쉽지 않습니다. 말로는 잘 설명하는데, 누가 들어도 그럴 듯하게 명확하게 설명한다는데, 귀에 쏙쏙 들어올 만큼 재미지게 잘 설명한다는데, 나는 말로만 잘할 뿐, 이론으로만 잘 알고 있을 뿐 실천은 잘 못합니다. 중용은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닌 실천적 지혜인데 말로만 나불거리는 것이지요.

 

파주 강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나는 그렇게 사는 것처럼, 열나게 목소리를 높여 설파는 잘한다만, 이론적으로는 훤히 몇 시간이라도 중용을 재미난 예를 들어 설명도 잘할 수 있다만, 실천은 아주 잘 못하니까요. 때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가 하면, 섭섭하게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하니까요.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게 더 부끄러운 것이지요. 그럼에도 강의할 때는 마치 내가 그렇게 사는 것처럼, 실천이란 단어에 힘을 주면서 강조하면서 나는 정말 그대로 실천하는 것처럼 강조를 한다만, 실제는 오히려 남보다 못하니까요. 말과 실천이 달라도 아주 다른 나 같은 인간을 바로 위선자라고 하겠지요.

 

어제 서울은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이었다는데 파주의 하늘은 제법 멋진 가을 하늘이었습니다. 운정역에서 운정행복센터 가는 산책로도 지난주보다 더 아름답게 가을이 익었습니다. 그 길을 오가며 나를 돌아보았더니 내가 참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위선자였습니다. 많이 아는 만큼 더 멀리 간 위선자, 말로 많이 외치는 만큼 더 위선자, 때로는 위선이 더 좋다고 이론적으로 들먹여 나를 미화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실천은 못해도 남에게 좋은 말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럴 듯한 이론을 끌어대어 나 자신을 위로하거나 합리화할 수도 있을 테지만, 위선자로 살아간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파란 하늘에 나의 위선이 비추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하늘에 잘 어울리게 잘 익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나를 비웃는 듯 했습니다. 내로남불, 위선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내 머리 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다 아름답게 보내려는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예쁘게 발레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몸으로 저리도 아름답게 속까지 빨간 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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