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첫눈 입은 불암산
첫눈 소식, 아직은 떠날 준비가 안 된 가을, 도시엔 아직 단풍이 화려합니다. 생기발랄한 나뭇잎들이 아직은 가을이라는 듯 나무를 뒤덮고 있는데 첫눈 소식이 들려옵니다. 사람으로 치면 가을옷을 벗을 생각도 않는데 겨울이 가을옷은 이제 벗어버리라고, 그리고 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다그치는 격입니다. 고지가 높은 곳이야 이미 나무들이 완전히 벌거벗었다지만, 낮은 곳에는 여전히 생생한 나뭇잎들이 여전합니다. 생기를 좀 잃었다 한들, 가을색이 원래 퇴색이 되면서 고운 때깔로 변하는 것이니, 가을다운 가을이겠지요.
아침편지로 쓰려고 묵여두었던 고창 방장산 안내를 쓰고 있는데, 뉴스에서 눈이 그쳤답니다. 전날엔 눈이 온다는 예보였는데, 눈이 그쳤다니까 정시이 번쩍들었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멋진 풍경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얼른 하던 작업을 멈추고 컴퓨터를 껐습니다. 그리곤 잽싸게 산행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마침 영화 보기 약속이 열시인지라, 그 전에 다녀오려면 산을 탈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반남짓밖에 없었습니다. 하여 집에서 가까우면서 쉽게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는 불암산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무리 가깝다고는 해도 걸어서 산 아래까지 갈 수는 없으니 서둘러 전철역으로 가야 했습니다.
산 입구로 들어섭니다. 하얀 눈이 온통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전날까지는 한편으로는 단풍으로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까칠한 가을 분위기로 썰렁했는데, 산에 오길 잘했습니다. 멋진 산, 멋진 날, 입구부터 아주 멋진 풍경이 나를 반겼습니다. 철쭉동산은 온통 하얀 꽃들이 만개했습니다. 나뭇잎들 사이사이로 하얀 눈들이 소담소담 들어차서 마치 목화밭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솔가지에 쌓안 눈들의 모습은 어떻고요. 온통 하얀 세상 어디를 봐도 아름다웠습니다.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온통 아름다움으로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변해도 너무 변했습니다.
작고 아담한 불암산, 그럼에도 산이 갖추어야 할, 아니 명산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라 할 공원 같은 숲길, 악산이 갖추어야 할 암릉길, 진귀한 바위들이며 사방을 볼 수 있는 조망까지 아담하니 그 모든 걸 갖춘 산인데다 첫눈까지 덮여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을 들어 조금 멀리 보니 건너편으로 좌측에서부터 수락산, 다음엔 도봉산, 맨 우측에는 북한산 정상이 운해 사이로 빼꼼히 밖을 내다보는 듯한 풍경이 시선을 강탈합니다. 게다가 내 앞에는 아무도 지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아무 존재의 흔적도 없습니다. 첫눈내린 길을 제일 먼저 걷는다 생각하니 더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 일찍 온 것은 아닌데 평일이라, 그런데다 불암산은 주로 상계역에서 올라가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당고개역에서 오르는 덕분입니다. 첫눈, 처음 밟는 눈길, 아무도 가지 않는 첫 사람, 참 아름다운 풍경에 신비함을 보여주는 운해, 마음이 환해집니다. 눈꽃과 운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길은 미끄럽습니다. 특히 눈이 살짝 내리는 바람에, 아니 낙엽이 착 갈아앉지 않은 상태에서 눈이 쌓인 바람에 낙엽이 썰매 역할을 합니다. 조심조심 올라가긴 한다만 여름보다는 빠른 속도로 걸을 수 있습니다. 오르다 기분 좋게 사진을 찍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본다니 참 아깝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당고개에서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암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운해에 덮인 수락산 정상을 볼 수 있지, 도봉산 정상도 볼 수 있지, 북한산 정상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정상 말고는 산 아래쪽이나 도시는 얇은 속옷을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실루엣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정상 가까은 능선에 오르면서는 천마산이나 용문산도 보일 테지만, 운해에 빼꼼히 조금만 보였습니다. 정상 부근에 오르니 나보다 먼저 올라온 이들이 저만치 보였습니다. 미끄러지며 정상에 오르려니 조금 조심스러웠습니다. 잠깐 머물던 이들은 떠나고 혼자 정상에 섰습니다. 내가 마치 불암산 산신령이나 되는 듯이.
서둘러 하산합니다. 날씨가 쌀쌀한지라 힘이 덜 드니 시간은 넉넉합니다. 하산은 상계역쪽으로 잡습니다. 하산할수록 가을이 보입니다. 물론 온통 하얗지만 정상엔 앙상한 나뭇가지들에 눈꽃이 가득 피었지만 중턱쯤엔 아직 퇴색한 나뭇잎들이 하얀 옷을 덧입었고, 산 아래쪽에 거의 내려오니 아직 고운 단풍잎들, 빨갛거나 노란 단풍들이 마지못해 하얀 눈을 이고 있습니다. 도시로 들어서니 빨간 감들이 하얀 모자를 쓴 듯한 모습으로 하얀 눈을 이고 있습니다. 멋진 풍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첫눈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구경은 잘했다만, 기분은 무척 좋았다만 한편으로는 쓸쓸하 생각이 문득 듭니다. 철수 준비가 안 된 가을의 흔적이 왠지 씁쓸합니다. 산울가엔 여전히 가을옷을 입은 채로 겨울옷을 덧입은 나무들의 모습이 마치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모습을 반영하는 듯해서입니다. 정상부근에 앙상한 나무들이야 겨울의 옷 하얀 눈을 입은들 그렇다해도, 산중턱에 가을을 느낄 만한 나뭇잎에 하얀 눈을 덧입은 걸 조금은 이해한다 한들, 산울가 나뭇잎은 아직 생생하게 붉거나 노란데, 아무렇지 않게 하얀 눈을 냉큼 입고 겨울을 환영하는 듯한 모습이 아이러니 합니다. 마치 대세가 기울면 얼른 대세를 따라 줄을 달리 서는 사람들처럼, 이도 저도 아니면서 이쪽 저쪽 넘보는 사람들처럼 지금은 모든 나무들이 겨울을 환영하는 척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나무들에게 배신 당한 가을이 저기 쭈뼛거리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