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고창 방장산 산행기

영광도서 0 1,577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현장 아나운서의 말이 산을 울립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산 전체를 울리는 듯합니다. 숲에 사는 짐승들, 새들, 곤충들이 놀랄 만합니다. 어쩌면 저리도 큰 소리를 가진 동물이 잇을까, 숲에 사는 존재들은 그리 생각할 겁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숲에 사는 존재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와 달리 사람은 어떤 방법을 쓰든 가장 빠른 동물로, 가장 목소리 큰 존재로, 가장 힘센 존재로, 가장 무서운 존재로 자연을 위협하면서 삽니다. 모든 존재를 능가하면서 삽니다. 자연의 질서, 이를테면 원래대로가 아닌, 원래의 순서나 질서를 넘어서는 존재로 삽니다.

 

고창종합운동장 울타리를 우측으로 돌다가 운동장에서 조금 벗어나면 산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옵니다. 그 입구에 방장산임을 알리는 산행안내지도판이 있습니다. 그리로 들어섭니다.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숲, 그 숲길로 들어서면 계절과 관계 없이 늘 푸름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고, 아주 완만하지도 않은, 산길 다운 길입니다. 그리 힘겹지도 않게 걸을 수 있습니다. 약간의 경사만 아니라면 공원 산책길 같습니다.  그렇다고 급경사는 아닙니다. 약간 숨을 가쁘게 하는 완만한 경사입니다. 잘 정비된 길을 따라 걷노라면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 길로 들어서서 한참을 걸어도 인간들이 모여서 내는 소리가 산을 찌렁찌렁 울립니다. 산이 운동장을 품고 있는 듯 한데, 산보다 더 큰 소리로 산을 움찔거리게 합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소리, 자연에 반항하는 소리, 소리지르다 못해 확성기로 뿜어대는 인간의 소리가 숲을 소란스럽게 울립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져 생긴 대로 살건만 그걸 바꾸는 인간. 그걸 기어이 넘어서는 인간, 심지어 그걸 파괴하는 인간, 그 모두를 문명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인간들의 세계를 벗어나서 자연으로 향합니다. 조금씩 높아지는 길, 그러다 내리막길이 시작되면서 시야에서 인간들의 마을이 사라집니다. 소리 역시 줄어듭니다. 이제 엄마 품에 인긴 듯 고요합니다.

 

그 고요도 잠시 다시 들려오는 인간들의 소리, 가파른 경사가 숨을 몰아쉬게 합니다. 사람들의 마을도 다시 보입니다. 그렇게 오르막길이 다시 시작되면서 산악자전거길과 교차합니다. 사람이 걷는 길과 자전거 길이 교차하기를 반복하면서 조금 더 힘을 내 오르면 그리 내가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창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능선이란 뜻입니다. 그리곤 다시 조금은 편하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마라톤출발을 알리는 카운트다운, 오전 열시, 나는 정확하게 벽오봉에 있습니다. 전망좋은 봉우리입니다. 한 시간 채 안 걸려서전망 좋은 봉우리에 있을 수 있으니 편안한 산입니다.

 

벽오봉에서 아주 잠시 후면 또 하나의 봉우리에 냉큼 내려섭니다. 억새봉입니다. 행글라이더를 하는 곳이라, 노란 금잔디가 넉넉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가을임을 알려주듯 홤금빛 양탄자 같습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러도 좋을, 구르고 싶은 정겨우 금잔디 동산입니다. 이쯤에서 우측으로 몸을 돌리면 초가집 지붕 마냥 완만한 곡선인 듯, 직선인 듯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넉넉한 산이 나를 부릅니다. 바로 방장산 최고봉입니다. 그렇게 급경사도 아니라서 편안하게 오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왠지 넉넉하고 왠지 푸근할 것 같은 산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리 길지 않은 급경사 구간이야 있지요. 산은 산이니까요.

 

정상에 오릅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려 있습니다. 평편하게 펼쳐진 사람들의 마을, 논이며 밭이 보입니다. 우아한 능선의 산들이 보입니다. 계속해서 더 가고 싶지만 되돌아서서 온 길로 되돌아갑니다. 가파른 길을 내려와 조금 편안한 길이 나오면 에헤라 신발을 벗습니다. 맨발로 걷습니다. 발바닥이 유난스레 차갑습니다. 겨울을 느낄 만한 기온을 보다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까 지나간 봉우리에 다시 오릅니다. 억새봉입니다. 다시 사람들의 마을이 보입니다. 여전히 확성기로 쉼없이 올라오는 사람의 소리로 숲이 울립니다. 내리막으로 들어서면 잠시 후면 산행도 끝납니다.

 

부지런히 걸으면 오르막임에도 한 시간에 4키로는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산입니다. 그만큼 방장산은 산세가 아주 유합니다. 맨발로 걷고 싶을 만큼 육산이기도 합니다. 오르면서 산악자전거 길이 교차하기도 하면서 함께 길이 이어진다만 자전거를 타는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산객도 많지 않습니다. 처음 3키로까지는 하산 하는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을 뿐, 아무도 없습니다. 방장산 정상, 743미터의 고도니까 도봉산보다 조금 높습니다. 산은 높으나 언제나 사람들의 마을에서 벗어나지 않는 듯한 산, 산은 깊으나 사람들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않는 듯한 산입니다. 그만큼 마음 편한 산입니다.

 

아마도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모인 날, 문명의 도구를 총집합시킨 날의 산행이라 인간을 더 느낀 걸 겁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머무르게 하는 산, 사람들의 소리로부터 해방을 시켜주는 산, 문명의 이기를 떠나 발바닥으로 자연을 느끼고, 마음으로 자연을 품다가 사람들이 모인 운동장으로 들어섭니다. 다시 사람이 사람을 만납니다. 산에 들면 나는 없고 산만 있는 듯한데, 그래서 편한데,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니 벌써 긴장감이 서립니다. 내가 할 일들이 머리를 헤집고 나와 걸음을 서두르게 하고, 이리 저리 갈 곳을 찾게 합니다. 자연인에서 문화인으로 전환하는 순간입니다. 헐떡거리는 사람들이 언덕으로 달려 올라갑니다. 고생을 사서하는 마라토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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