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수미쌍관, 지리산 천왕봉에 다녀오다

영광도서 0 1,583

수미쌍관,  글쓰기에서 머리와 꼬리가 상관되게 쓰는 법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명쾌한 글을 쓰는 데 좋습니다. 처음 문장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의 골자요, 그걸 꼬투리 잡아 논리를 펼치고, 마지막에 주장의 골자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라 명쾌할 뿐만 아니라 독자가 글쓴이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만 그런 게 아니라 삶도 수미쌍관처럼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 싶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하지만요. 한 해 한 해를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무리하겠다는 두 기둥을 세워놓고 실천해 보는 것이지요. 같은 곳에서 시작하고, 그곳에서 마무리짓기 말입니다.

 

지리산 천왕봉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1월 3일, 새해 첫 산행을 지리산으로 잡았습니다. 성삼재에서 출발, 천왕봉에 올랐다가 백무동으로 하산하기, 하루 종일 11시간을 걸었습니다. 무박일일 종주로 새해를 열었드랬습니다. 지리산 산행으로 시작했으니, 다시 지리산 산행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생각을 했습니다. 12월이 거의 간 시점에 하면 더 제격이겠으나, 시간 난 김에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입산금지 기간이라 종주는 못하고, 백무동에서 출발, 다시 백무동으로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서울에서 백무동에 왔다 갔다 하는 버스가 하루에 여러 번 있는 덕분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왕복 15키로지만 버스터미널에서부터 따지면 대략 왕복 16키로, 그리 긴 거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느 산과 달리 지리산은 오르기가 조금 더 힘이 듭니다. 편도 8키로가 채 안 되지만 거의 오르막인데다 바닥은 머덜이라 발을 딛기가 조금은 짜증날만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동바위까지 오르고 나서 한숨 돌릴 즈음이면, 제법 올랐구나 싶습니다. 다시 가파른 머덜길을 터덜터덜 걷노라면 기억하기 쉬운 곳, 참샘입니다. 사계절 내내 거의 물이 안 나오는 적이 없을 만큼 깨끗한 샘입니다. 여기서 목을 축이고, 급경사를 한참 오르면, 그제야 몸이 좀 쉼을 얻을 만합니다.

 

조금은 편한 길을 사색에 젖어 걷다가 오르막을 좀 걸어 올라야 합니다. 한참 걸었다 싶을 즈음, 우측으로 밋밋하게 꺾이면서 좀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 그 길 끝에 장터목산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해돋이를 보고 싶다거나 하룻밤 산에서 쉬고 싶다거나 하는 이들이 여기에서 일박합니다. 숙소가 있습니다. 또한 취사할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심신을 보충하고 마지막 힘을 내어 천왕봉에 오릅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산장까지 5.8키로미터, 장터목산장에서 천왕봉까지 1.7키로미터입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그리 거리가 멀지는 않지만 경사가 심한 편이라 조금 힘이 들지만, 이제 정상이 멀지 않았다 위로하면서 오르면 그리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을 겁니다.

 

부지런히 걸으면 다섯 시간이면 왕복할 수 있는 코스, 이번에는 천천히 힘 안 들게, 땀 별로 안 나게 거의 하루 종일 걸었습니다. 날이 맑으면 해돋이를 볼 수도 있을 시간이지만, 날씨를 보아하니 해돋이는 글렀고, 그냥 오르는 데 만족하기로 하고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장터목산장까지는 어둠 속에서 걸었기에 상고대의 아름다움은 만끽하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자 참으로 상고대들이 아름답게 피었음을 알았습니다. 장터목산장에서 요기를 하고 천왕봉으로 향했습니다. 눈발이 간간히 날렸습니다. 곳에 따라 바람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생각보다는 그닥 춥지 않았습니다. 오르면 오를수록 멋진 풍경이 걸음을 멎게 했습니다.

 

눈꽃터널, 아니 상고대터널이라고 해야겠지요. 색깔은 같은 하양이지만 나무에 따라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어난 상고대, 너무 아름다워 뭐라고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적합하다 싶었습니다. 제석봉에는 떡취 이삭들에, 생을 다한 주목이거나 생생히 살아 있는 주목에 핀 하얀 꽃이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즐겁게 했다기보다 안구정화를 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도 푹 젖었습니다. 멀리, 머얼리 내다볼 수 있는 시야는 잔뜩 흐린 대기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그걸 빼고는 너무 아름다워 예가 선계인가 할 정도였습니다.

 

제석봉을 지나 우측으로 밋밋하게 돌아 다시 통천문으로 오르는 길은 완전히 상고대터널이었습니다. 나무마다 각기 아주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벼랑에 매달린 하얀꽃들하며, 논피 속아 마치 사슴뿔들처럼 멋지게 핀 꽃들이며, 소담스럽게 핀 꽃들, 모두가 하얀 색 한 가지였으나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었습니다. 어느 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각기 다른 아름다움으로 한껏 제 모습을 드러내며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통천문을 빠져나와 내러다보니, 구름속에 뭎경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통천물을 이루는 바위벽에는 돌뜸에서 살아남은 나무들이 아주 아주 아름다운 눈꽃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풍경에 취해, 아름다움에 젖어 찬바람도 차다 하지 않고 오르다 보면 천왕봉 정상입니다. 평일인데다 날씨가 춥다는 일기예보 탓인지, 정상엔 아무도 없습니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흐려서 멀리 내다볼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여러 장면을 봅니다. 아직 일정은 남았으나 한 해를 천왕봉에 오르면서 시작하고, 천왕봉을 돌아 내려감으로써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으니 즐겁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멋진 풍경, 겨울의 참맛을 마음껏 누리고 이제 천왕봉을 떠납니다.

 

2017년의 산, 수미쌍관, 첫산행을 지리산으로, 마무리산행도 지리산으로, 물론 올해 몇 번 더 다른 산에 오르긴 하겠지만, 올해 내로 지리산에 다시 오지는 못할 수도 있기에. 2017년이란 삶의 산, 산을 넘듯이 아름답게 넘은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았고, 즐겁게 살았고,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잘 산 게지요. 형식으로도 그렇지만 한 해를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 있다 싶습니다. 적어도 용두사미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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