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1- 돼지와 신령들의 악연

영광도서 0 536

문명,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신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소위 잡신들이라면 잡신들은 하나 둘 죽는다. 엄청나게 큰 나무에 살던 신, 아주 멋지고 거대한 바위에 살던 신도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 신이 거주하던 성스러운 장소는 더 이상 성스러움을 잃고 신작로로 변하고, 이름을 잃는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마을사람들 전체가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 두 곳 있었다. 도관리와 광암리의 경계를 자키고 선 가족고개의 서낭나무 아래와 백우산 정상 밑에 조금 내려와 다락터 숲속 제당이었다.

 

가족고개엔 엄청나게 큰 소나무, 서낭나무가 있었다. 짐작컨대 수백 년은 됨직한 나무였다.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오면 거룩한 신처럼 버티고 선 소나무는 아주 좋은 그늘을 제공했다. 흙 밖으로 내놓은 굵직하면서도 우람한 뿌리는 지친 몸을 쉬기에 딱 좋았다. 그런 뿌리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마침 바람길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으로 더위를 식힐 수 있어서 좋았다. 단오절이면 동네어른들이 엮은 밧줄로 그네를 맬 수 있는 단단한 가지를 내어준 엄청나게 큰 소나무, 단오날이면 하루 종일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네를 즐기거나 구경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다. 서낭나무란 이름을 얻은 거대한 소나무, 이 나무엔 신이 살고 있었다. 해마다 한 번 돼지머리를 드셨고, 동네어른들이 부어주는 막걸리를 마셨고, 재수음식을 드셨으며, 뭔가 적힌 창호지 리본들을 매단 새끼줄로 이은 울긋불긋한 치마도 입었다. 이 나무에 서낭신이 살고 계셨다.

 

사람 사는 마을 다락터가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 더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면 제당이 있었다. 울긋불긋한 색깔을 입은 작은 집이 있었는데, 그런 색깔이 주는 성스러움인지 왠지 귀신이 나놀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인지 가까이 다가가기에도 두려운 제당이었다. 그곳엔 아무나 다가가지 않았다.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일 년에 한 번 되재고기를 드시는 신, 백우산 산신령이 여기에 살고 계셨다.

 

우리 동네엔 이렇게 가족고개에 서낭신과 백우선 산신령 두 신이 있었다. 동네에서 연례행사로 일 년에 한 번, 여름이면 치성을 드렸다. 해마다 돌아가면서 치성을 맡는 집이 정해졌고, 그 집에서 치성에 쓸 막걸리를 담가야 했고, 여러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물론 거기에 들어갈 비용은 동네에서 동일하게 갹출하였다.

 

치성을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돼지고기였다. 하여 돼지는 반드시 한 마리를 잡았다. 우리 동네에선 추워서인지는 몰라도 돼지를 기르는 집이 한 집도 없었다. 그러니까 치성을 드릴 때 돼지를 동네에서 조달할 수 없었다. 반드시 오일장에 가서 돼지 한 마리를 사와야 했다. 동네어른 몇몇이 그 책임을 맡았다. 경운기도 없었고 산판나무를 실어 나르는 트럭 외엔 다니는 차도 없었다. 때문에 장에서 선택을 당한 돼지를 어른들은 앞에서 끌고 뒤에서 얼러대며 족히 6킬로미터 가까운 비포장 신작로, 개다가 가파른 가족고개를 데리고 넘어와야 했다. 영문 모르고 끌려온 돼지는 그날 저녁이면 제물로 변했다.

 

우리 집도 한 번 제주를 맡았다. 치성을 드리기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는 마음을 다 잡고 부정을 타지 않으려 노력하셨다. 치성 전날 어른들이 돼지를 몰고 우리 마당에 들어섰다. 우리 집에서 돼지를 잡았고 동네아주머니들이 모여들어 돼지 순대를 물로 씻어 정성스럽게 순대음식을 만들었다. 돼지를 손질하던 어른 중 한 분이 돼지 불알을 떼어 장난스럽게 바람을 불어 공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면 아이들은 재미있어라하면서 돼지불알을 공삼아 마당 한 켠에서 놀았다.

 

동네어른들이 함께 모여 제를 올리는 의식은 하루였지만 제주는 사흘을 정성들여 서낭나무와 제당에 제를 올렸다. 동네 어른들 덕분에 서낭나무의 서낭신과 제당에 산신령은 일 년에 한 번 돼지머리를 드셨고, 막걸리를 마셨으며 향을 흠향하셨다. 하지만 그토록 고명하셨던 신들도 어느 순간 돌아가셨다. 우리 동네에 가족고개를 내려와 500여 미터 내려온 지접 쯤 우측 언덕 위, 작은 산 밑에 감리교회가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똑똑한 아저씨가 교인이 되면서, 이어서 몇몇 영향력 있는 어른들이 교인이 되면서, 동네에서는 더 이상 치성을 드리지 않았다.

 

치성을 드리지 않으니, 고생고생하면서 몰림을 당하며 가족고개를 넘어오는 돼지의 희생도 없었다. 더 이상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고 막걸리를 마실 수 없는 신들은 제당을 떠났고, 서낭나무를 떠났다. 제당은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고 백우산 산신령도 죽었다. 마찬가지로 치성제는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서낭신을 믿는 몇 몇 사람에 의해 가끔 마른 북어나 막걸리 한 잔씩 얻어 머시던 서낭신도 더는 서낭나무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동네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단오 때면 그네잔치를 허락했던 서낭나무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사정없이 잘린 채 세상을 떠났고 서낭신도 종말을 고했다.

 

의식이 있는 어른들이 우리 동네에 살았다면 보호수로 지정받을만한 나무였다. 딱 봐도 성스러웠다. 수령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냥 나무는 나무일 뿐 별로 생각이 없던 이들뿐이어선지 서낭나무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몇몇 토박이 어른들 마음속에만 살아 있을 뿐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가 고향을 떠난 지도 어언 4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엔 아직 넓혀지고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복판에는 잡풀이 아무렇게나 자라 있고, 차바퀴가 지나가는 양쪽으로 나란히 평행선을 그린 듯 길이 나 있는 신작로, 도관리에서 힘들게 넘어오다 고개턱에 오르면 거대하면서도 신령한 그늘을 제공하면서 신령스럽게 우뚝 서서 쉼을 맞는 사람들을 묵묵하면서도 듬직하게 지켜주는 듯한 신령스런 할아버지 서낭신이 기거할 듯한 서낭나무의 웅장한 모습이 뚜렷이 기억난다. 물론 나 역시 서낭신의 존재를 더는 믿지 않는다. 백우산 산신령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나부터 믿지 않으니 신들은 더 이상 살지 못한다. 사람들이 부르거나 말거나 치성을 드려주거나 말거나, 찾아주거나 말거나 그럼에도 살아 있는 신만이, 마음을 채운 신만이 진정한 신으로 살아 있다. 문명을 이긴 신만이 진정한 신일 것이다. 서낭나무도 아니고 바위 밑도 아닌, 내 마음을 여전히 차지한 신만이 진정한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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