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39- 정의를 내릴 자격

영광도서 0 483

정의를 정의한다. 어떤 그 무엇을 정의하기는 쉽다. 일정 요건만 갖추면 그것은 나름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곧 무엇을 놓고, 그 무엇에 관해 설명을 하되, 청자로부터 공감이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무엇에 대한 정의이다. 딱히 공인 받은 정의는 아니어도 나름의 정의이다. 세상의 모든 정의는 이처럼 소박하게 출발한다. 다만 누가 무엇을 정의하느냐에 따라 공인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뿐이다.

 

이를테면 같은 수준의 말이라도 누가 하면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누가 하면 무시한다. 같은 말임에도 다른 가치, 누군가에겐 억울한 일이지만 사람은 이처럼 공평하지 못하다. 모두가 나름 공평을 말하나 공평하지도 않고, 평등을 말하나 평등하지도 않고, 정의를 말하나 정의롭지도 않다. 그냥 나름일 뿐이다. 그냥 그렇다고 스스로를 믿거나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이처럼 딱 자를 수 없으며, 기계적이지 않은 마음의 모습을 주관적이라 한다.

 

이러한 주관성은 많은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며, 이러한 주관이 인간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면서 모든 언어를 혼란스럽게 한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려는 노력이 정의로움인데, 이 마저도 주관의 개입으로 불명확하게 한다. 다만 그것을 그렇다고 믿는다.

 

보라! 우리가 배운 정의들을, 배우려는 정의들을. 그 모두는 그럴듯한 설명일 뿐이다. 누가 그럴듯한 설명을 했나? 가만 그럴듯한 말들을 보면 보편타당한 말들로 별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그냥 공감할 내용들이다. 그런데 그 말들은 특정한 누군가의 말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누군가의 눈속임에 속으면서도 그것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충분한 말임에도 그걸 대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말들이 정의로 자리 잡는다.

 

같은 수준의 말이라도 엄격하게 기계적으로 따지면 그 말이 그 말임에도 누군가의 말은 공인을 받고, 누군가의 말은 무시당하는 것, 이는 일종의 권위이다. 권위는 공인으로 끝나지 않고 가치로 이어진다. 누구의 말만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님에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인정하는 순간 가치는 확 달라진다. 때문에 거의 다를 것 없는 말을 누군가 어느 곳의 대강당에서 강의를 했다고 치자. 그는 한 시간 강의료로 천만 원을 받는다. 그런데 누군가는 한 시간 강의료로 오만 원도 받지 못한다. 이들의 강의 내용을 글로 옮겨 누구의 무엇이라 밝히지 않고 가치를 논해 보라. 그만큼의 가치 차이가 있을까?

 

권위도 결국 주관이 만들어낸다. 주관들이 만든 함정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은 정의를 갖는다. 그리고 그 정의를 배운다. 절대 정의가 아니라 주관적 정의를 배운다. 그것을 마치 절대 진리로 생각하기도 한다. 절대적이지 않은 절대의 인식, 이러한 우리의 불공평한 주관성이 세상을 코스모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카오스로 만든다.

 

그래 세상은 돌고 돌다 제자리로 돌아간다. 천지창조 이 전의 세계는 카오스였다가 점차 코스모스로 향하다가 어느 정도 코스모스의 상태로 변하나 싶으면 다시 카오스로 돌아가는 이유, 거기엔 인간의, 인간만이 갖고 있는 주관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무엇을 나름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보잘것없는 나의 정의는 정의를 내린들 정의가 아니다. 대단한 너는 대수롭지 않은 정의를 내리면 그대로 정의로 인정받는다. 아니꼬우냐? 그러면 출세하라! 그렇다. 알고 보면 세상은 공평을 말하나 공평하지 않다. 정의를 말하나 정의롭지 않다. 공정을 말하나 공정하지 않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말장난만 남는다. 그럼에도 나는 정의를 내린다. 세상의 그 무엇에 대해 나름이 정의를 내린다. 누군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정의를 내리는 나가 있으므로, 이런 나들이 있으므로 적어도 지적인 사기를 덜 당할 테니까. 너도 정의를 내려 봐. 네가 내리는 정의도 대단하다니까. 다만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그러니까 나는 너의 정의를 인정한다고. 너의 정의는 소박하고, 진솔하니까. 진정한 가치를 지닌 정의는 네가 내리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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