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 부모님은 엿장수셨다

영광도서 0 520

자연스러운 삶이란 무엇일까? 그저 흐르는 대로 사는 것, 왜곡하지 않는 것, 어쩌면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사는 것일까? 지독하게 가난하면 무계획이 계획이다. 달리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다. 계획을 세운 들 망상에 불과할 뿐이기에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조금 가난하면 먼 계획은 못 세워도 가까운 계획을 세운다. 그나마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우리 집으로 따지면

 

지독하게 가난한 축에 들었다. 무지한 탓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야 다들 그렇듯이 가족계획을 따로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애가 생기면 애를 낳았다. 대부분 한 집에 식구가 어른 아이 합해 일곱 이상이었다. 우리 집 역시 그랬다. 내가 막내일 듯싶었는데, 이후 둘이나 더 보탰다. 오 남 이 녀로 위로 형 둘, 누나 둘, 아래로 동생 둘, 나는 딱 중간이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누구 하나 밥벌이를 할 나이도 안 되었고, 달리 일거리도 없으니 엄마와 아버지는 밤낮없이 일을 하셔야했다. 겨울이면 할 일이 없었다. 가을에 거두어들인 곡식이야 농협에서 외상으로 쓴 비료나 농약 값으로 나가면 집안에 남은 낟알이라곤 옥수수나 콩 그리고 팥 얼마간 있었다. 그것으로 죽을 쑨들 겨울나기도 어려웠다. 해서 엄마와 아버지는 겨울이면 장돌뱅이로 나서야 했다. 장돌뱅이라고 장마당에 아무데나 놓고 물건을 팔 수는 없었다. 5일 단위로 돌아가는 장에 어쩌다 자리를 잡은 신남에서만 자라 하나 잡고 그날이면 여지없이 그곳에 가서 옥수수엿을 팔았다. 나머지 날들은 행상을 하셨다.

 

하루 날 잡아 하루 종일 엿을 고셨다. 전날 밤엔 맷돌질을 하고, 당일 날엔 하루 종일 가마솥에 불을 때서 엿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도 엿거리라야 옥수수밖에 없었다. 겨울밤이 길고 길다고 한 들 잠도 주무실 수 없었다. 엿을 다 고면 밤에는 식기도 전에 뜨거운 상태로 엿 청을 좋게 하기 위해 엄마와 아버지는 엿을 늘이셨다. 양쪽 끝을 맞잡은 엄마와 아버지는 가끔 밀가루를 바르면서 엿을 죽죽 늘이셨다. 그러면 점차 옥수수엿이지만 붉기만 하던 엿은 조금은 쌀엿처럼 약간의 흰색을 내었다. 그렇게 엿 청을 곱게 한 다음엔 추 저울로 무게를 달았다. 반 되짜리, 한 되짜리 등으로 크기를 다르게 나눈 다음 크고 작은 원반 모양으로 곱게 모양을 만든 다음 밖에 내놓았다. 아침이면 엿은 아주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일일이 셈한 엿들은 따로 팔 엿이었다. 집에서 먹을 수 있는 못생긴 엿은 따로 두었다. 불문율을 어기는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엿을 짊어지고 신남장에 가서 팔아 돈을 만들거나 그날 아니면 우리 동네 말고 먼 동네를 집집마다 다니시면서 엿을 파셨다. 돈 대신 다른 곡식으로 바꿔 오셨다. 그러니 짐은 줄지 않고 때로는 짐이 점점 늘기도 했을 터였다. 그렇게 농한기에도 쉴 날이 없으셨지만, 가난은 야속하게 늘 구르는 마차바퀴처럼 영원할 듯싶은 윤회를 계속 이었다.

 

장사를 나선 부모님이 안 계신 동안 우리 형제들은 화롯가에 둘러앉아 부모님 돌아오시기만 기다렸다. 아무리 배고파도 먹을 것이라곤 별로 없었다. 때로는 방바닥에 깔린 먼지 풀풀 나는 갈대자리 밑을 뒤져서 옥수수 낟알을 찾아서 자리의 모서리 부분에 갈대를 잘라서 꼬챙이를 삼아 거기에 옥수수 알을 꿰어 거의 재로 변한 화롯불에 그걸 넣어 익혀서 먹었다. 그걸로 배가 부를 리 없지만, 배고픔도 일상이라 그다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먼 계획을 세울 수 없었던, 아니 계획을 세울 줄 몰랐던 엄마와 아버지, 타고난 팔자려니 하고 낙 없이 사셨을 엄마와 아버지, 사람인지라 걱정은 많으셨을 엄마와 아버지, 이제야 그 마음 알 것 같다. 줄줄이 낳아 놓은 자식들 먹여 살리려니, 다른 희망보다 저것들 굶기지는 말아야지, 그 생각밖에 할 수 없으셨을 엄마와 아버지, 무계획이 계획이셨던 그때 그 시절, 요즘 화제인 영화 <기생충>에서도 그러던데,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게 계획이라고.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조금만 이렇게 하고, 요렇게 하면 사글세도 면하고 전세도 면하고 언젠가는 집도 장만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들 할 테지만. 나쁜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이야 왜 없으셨을까만 아무리 굶어 죽더라도 남한테 피해를 주면 살아선 안 된다며, 죽을힘을 다해 자존심만은 지키며 사셨던, 정직하고 당당하셨던 엄마와 아버지, 그분들이 자랑스럽다. 지금은 저 세상에서 모두 다 내려놓고 그런 걱정일랑 옛날이야기처럼 나누고 계시려나. 할 수만 있다면 나 역시 저 세상에 갔을 때 엄마 아버지 만나 화롯가에서 그 시절 이야기로 밤을 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젠 어른답게 ‘엄마 괜찮아요. 아버지 괜찮아요. 가난은 죄가 아니에요. 저 원망 안 해요.’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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