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6- 나의 아홉 살 인생 그 이후

영광도서 0 480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때로 돈 많은 정치인이나 부자들 중 돈 문제로 뉴스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저토록 돈이 많은데 뭔 돈이 더 필요해서 욕심을 내다 저 지경까지 됐을까’싶고, ‘나 같으면 그 정도 돈 갖고 있으면 더는 욕심 안 내고 편안히 먹고 살다 가겠구만, 천년만년 살겠다고 저리 욕심을 부리다 패가망신을 할까’ 하는 생각을 잇는 때가 있다.

 

한없는 욕심, 그 상황에 이르면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올 리 없으니 지레 포기한 마음에서 오는 정신승리일지 모르겠다만,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지금의 나를 사랑한다. 관리랄 것도 없지만 아내가 모든 걸 관리하니 나는 내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니, 부자 아닌가. 그다지 재산에 관심이 많지 않은 건 아무리 못살아도 어릴 적만 하랴 그런 생각이 있거나 내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일지는 모르겠다.

 

말인즉, 아마도 초등학교 때 선생님 말씀대로 중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나로 살았을 것이다. 너무 빨리 철이 든 때문에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아홉 살 때 목은 마음, ‘나는 공부를 무척 하고 싶다. 나는 언젠가는 공부로 성공할 거야. 그러나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남한테 신세를 지면서는, 식구들한테 피해를 주면서는 공부하지 않을 거야’ 그 결심을 나는 지켰다. 일 년이면 농사 도우랴, 심부름하랴, 어느 해인가는 결석일수가 34일이나 되었어도 우등상을 놓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옷은 꾀죄죄했고, 때조차 잘 씻지 못했으나 선생님들이나 아이들로부터 무시는 당하지 않았다.

 

6학년 때 아이들 진학여부를 선생님이 물을 때였다. 학교 운동장 뒤편 벚나무 아래에 분단 별로 세워 놓고 선생님이 중학교 진학할 인원을 확인했다. 47명의 학생 중 중학교 진학하겠다는 아이는 7명이었다. 확인을 마친 선생님은 나한테만 다가오셨다. 왜 손을 들지 않았는지 물으셨다. “00이 강의록이나 보면서 공부하래요.”라고 말하면서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선생님은 “너 같은 놈이 중학교에 안 가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중학교에 가니?”하시면서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아이들 원서에 붙일 사진 찍으러 가는 날 무조건 사진관에 가는 거다!” 라며 다짐을 주셨다. 간신히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대답은 했으나 나는 속으로 이미 포기한 터였다.

 

사진 찍으러 가는 날, 나는 학교에 가는 대신 작은형과 함께 호밀밭에 들어가 숨었다. 혹시 선생님이 나를 찾으러 아이들을 보내든가 집으로 찾으러 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진을 찍으려면 면소재지 마을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그날만 넘기면 끝이었다. 호밀밭에서 저녁 때 까지 놀다가 아이들이 신작로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척하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더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 까만 교복에 빛나는 황금색 중자가 달린 검은 모자를 쓴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부러웠다. 우리는 졸업한 이듬해 살던 집마저 팔고 깨 넘어 불당골 사돈집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어느 어른의 권유로 면 소재지에 재건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가 건너다보이는 내촌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중학교로 스무 명 가량의 아이들이 있었다. 딱 일주일 다니고 그만두었다. 재건중학교라도 다른 아이들은 그럴 듯하게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다녔지만, 나는 여전히 검정고무신에 책보에 그냥 일반 옷을 입고 다녔다. 그것까지는 견딜 만 했는데 그곳에 가려면 가끔 낯선 아이들이 길가까지 쫓아 나와 놀리곤 했다.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집으로 돌아오다 집 바로 아래 폭포수 아래에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특별히 울 이유는 없는 것 같았으나 어깨가 들먹일 큼 흐느낌이 한없이 올라왔다. 그날로 내 중학교 시절은 막을 내렸다.

 

그랬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중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내 인생은 훨씬 쉬웠을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로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사회적 위치도 높았을지도 모르고, 지금보다 훨씬 부자로 살고 있을지도, 소위 말하는 士자를 가진 직업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나가 잘 되었을지도 모를 나보다 지금의 나를 원한다. 돌고 돌아오다 보니, 힘든 삶을 살아오다 보니, 마음에 여기 저기 그늘이 얼룩져 있을 테지만, 그래도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 정호승 시인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지만 그늘은 잘못 마음먹으면 누군가에게 부담을 준다. 그런 그늘이 나에겐 많을 테지만, 나름 ‘그늘로 남한테 부담은 주지 않으려 살아야겠다.’다짐하면서 그런 대로 무난히 살고 있는 내가 좋다.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의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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