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5- 작은누나 마중하던 날!

영광도서 0 537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 노래를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 하나, 작은누나다. 학교엔 거의 다니지 못했지만 작은누나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뗄 수 있게 가르쳐줄 만큼, 엄마 말씀대로 정신이 좋았다. 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학교엔 다니지 못하고, 집안 일 돕느라 거의 못 갔다. 작은누나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더 있었으니, 줄줄이 이어 동생들 업어 키우는 것은 작은누나 몫이었을 터였다. 작은형보다 세 살 위라 작은형과는 자주 싸우기도 했지만, 무척 엄했다. 아래로는 모두 남자동생들이라 더 세게 대했을 터였다. 때문에 작은누나는 무척 무서웠다.

 

그랬던 작은누나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서울로 간 거였다. 초등학교 졸업할 나이가 막 지났을 무렵 작은 누나는 서울로 식모살이를 간 거였다. 아버지가 의남매를 맺어 우리가 수양고모라고 불렀던 고모의 소개로, 가정 일도 돕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약속을 받고 서울로 갔다.

 

작은누나가 서울로 간 후로는 막냇동생 업어주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 업어주면서 토끼풀 뜯을 때면 작은누나 생각이 많아 났다. 내게 주어진 일도 일이지만, 내가 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받아오면 그걸 똑같이 칼로 나누어주었던 누나, 작은형과 내가 싸우거나 형제들 간에 싸움이 일 때면 질서를 잡아주었던 작은누나가 막상 없으니까 작은누나가 무척 그리웠다.

 

아버지께서 큰누나 시집가던 날, 저녁 무렵 중절모자를 쓰시고, 큰누나 이름을 부르며 돌아오시던 그 길, 가족고개에서 신작로를 따라 백여 미터 내려오면 작은 갈랫길로 접어들고, 오십여 미터쯤에 있는 갈대밭, 오후가 되면 가족고개를 바라보았고, 신작로를 거쳐 소로를 눈으로 훑으며 혹시나 작은누나가 오나 하고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면 <오빠생각>을 작은누나 생각으로 개사해서 부르면서 작은누나를 그리워하곤 했다.

 

그러다 실제로 작은누나가 모습을 보여주는 날이 있었다. 저만치 가족고개 아래로 사람이 내려오면 우선 남자인가 여자인가 살피다, 아줌마인가 아가씨인가 보다가 아가씨다 싶으면 작은누나일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덕분에 작은누나가 집으로 올 때면 항상 우리 레이더에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누나는 늘 오후에만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집에 오려면 마장동버스터미널에서 내촌 현리라고 쓴 대한교통이나 금강여객 버스를 타면, 버스는 양차선 도로밖에 안 되는 길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이 정거장 저 정거장 들린 후, 내촌면소재지에서 내려주고는 현리로 떠났다. 그러면 거기서 6킬로미터는 되는 까마득한 가족고개를 걸어서 넘어야 했으니, 아침 일찍 버스를 타야 저녁 무렵이나 되어야 집에 올 수 있었다. 때문에 작은누나가 오는 모습은 일찌감치 우리 눈에 잡혔다.

 

백우산 산자락이 그림자를 산발치로 점점 늘려갈 즈음, 작은누나가 모습을 보이면 나와 동생들은 쪼로록 달려갔다. 그러면 갈대밭 조금 지날 즈음에 논두렁길에서 작은누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걸 알아선지 작은누나는 올 때마다 그냥 오는 적이 없었다. 묵직한 가방에선 신기한 것들이 나왔다. 우선 과자는 기본이었다. 그리곤 반들반들 빛을 내며 단단한 작거나 큰, 은은한 여러 색깔을 지진 조개껍질들, 쇠뿔처럼 생긴 신기한 소라껍질들이 가방에서 나왔다. 처음 보는 것들이라 신기했다. 소라껍질을 귀에 대보라고 해서 귀에 대면 정말 바닷소리가 솨아하고 들리는 게 신기했다. 우리에겐 과자도 과자지만 그런 것들이 큰 선물이었다. 덕분에 작은누나가 서울에서 잠시 왔다 가는 날은 동네친구들에게 자랑스러웠다.

 

그때는 작은누나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했다. 작은누나가 돌아가는 날, 어린 나이에 남의 집 살이하다가 어쩌다 고향 집에 잠시 쉬러 왔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서울로 향했을 작은누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오면 얼마나 돌아가기 싫었을까? “몸 성히 잘 있다가 온나!”라며 배웅하시던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전혀 못한 나는 무거운 작은누나 가방을 들고 나서서 이젠 언제 다시 올지 물으며 가족고개까지 따라가서 작은누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의 굽이를 바라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작은누나는 굽이를 돌아서선 어쩌면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내려갔으리라. 지금 다시 생각하면 씁쓸한 스케치라고나 할까, 은은한 수채화라고나 할까, 작은누나가 고개 아래 신작로에 등장하기를 기다리면서 가끔 부르곤 하던 작은누나 생각, 그 노래를 부르던 어린시절의 내 모습이 낯선 소년의 모습처럼 살아난다. “몸 성히 잘 있다가 온나!”하시던 엄마의 목소리, 그리고 작은누나의 쓸쓸한 뒷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클로즈업된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누나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누나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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