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1- 술로 망한 우리 집
그리스신화에서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아내와 결혼한다는 신탁이 두려워 갓 태어난 아들의 발등에 녹슨 못을 박아 불구로 만들어 내다 버리게 한다. 그런데 후일 아들은 살았고, 성장한 아들은 발에 입은 장애 때문에 늘 들고 다니던 창으로 부지불식간에 아버지를 죽인다. 라이오스는 자신의 잘못으로 들려준 아들의 창에 객사한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는 교훈, 아들의 불구는 아버지가 만든다.
강원도 홍천, 그리고 내촌면 도관리 불당골, 할아버지가 터전을 잡은 곳이다. 이곳에서 할아버지는 사시다가 돌아가셔서 밭과 산이 만나는 양지바른 곳에 묻히셨다. 그렇다고 나에게 피를 이으신 분은 아니셨다. 내 아버지를 양자로 들여 키워주신 분이었다. 그럼에도 완고하신 성격 덕분에 감히 일본 순사들이 얼씬도 못할 만큼 대가 굳으신 덕분에 내 아버지는 별 탈 없이 일제시대를 무사히 건너셨다. 살아갈 기반도 받으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꽤 되는 재산을 많이 날리셨다.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 점차 재산이 줄었다.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귀가 엷다면 엷은, 무지하다면 무지하셨다. 그 바람에 6.25전쟁이 났을 때는 불당골 집과 토지뿐이었다. 그곳에서 전쟁을 맞았다. 마치 태아를 품은 자궁처럼 아늑한 곳이어서 전쟁이 나고도 그냥 지나간 집, 그러다 소위 인민군대가 후퇴할 때만 전쟁의 산고를 치루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포탄과 총 소리 때문에 낮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호랑바위굴에 숨어서 보내야 했단다. 입구는 간신히 기어들어가야 할 만큼 좁았으나 안에 들면 방처럼 넓어서 당시 네 식구가 충분이 들어가 앉아 있을 만큼 넓었다고 했다. 후일 엄마 말씀하시길 굴속에 들어가 있는데 당시 다섯 살이던 큰누나가 어찌나 울어쌌는지, 겁이 난 큰형이 엄마에게 큰누나를 내다버리라고 했다며 웃으시기도 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위기일발의 북한군이 후퇴한 후 오지게 적들이 들이닥친 것은 1.4후퇴 때였단다. 엄청나게 많은 중국군이 들이닥쳐 우리 집을 차지하고, 눈에 띄는 소는 잡아서 식사대용으로 하면서 사흘이나 머물렀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엄마의 재치 덕분에 아버지는 여전히 소똥을 채우고 다리를 절룩거리는 연기로 전쟁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했다.
마냥 착하기만 하셨던 아버지, 주색잡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그 중에 술은 무척 좋아하셨다. 술을 어찌나 좋아하셨던지, 아버지는 양조장에서 지게로 술을 져서 나르는 일을 하실 때, 주인이 앉은 자리에서 술 한 통(20리터)을 마시면 술값을 받지 않겠다는 말에 그걸 해냈다며 신소리를 하셨다. 그렇게 술을 즐기신 때문에 더는 일을 하지 못하실 만큼 술병에 들고야 말았다.
그때부터 엄마는 집안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으셨다. 재산은 거의 다 날린 즈음에서야 엄마의 발언권이 생겼고, 무기력한 아버지는 엄마의 의견을 때로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그리고 마지막까지 잡고 있었던 불당골 집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고 했다.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의 본거지는 강원도인데, 나만 유일하게 충청도에서 만들어졌고 거기서 태어났고, 거기서 일 년을 산 원인이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엄마가 전해준 내가 만들어지기 전 아버지의 흑역사라면 흑역사였다.
나는 가끔 누군가 가족의 역사를 물으면 술 때문에 망한 집안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술 때문에 엄마는 무척 고생하셨다. 때문에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엄마가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나 역시 아버지를 닮은 면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술 마시는 자랑으로 술 한 통을 한 자리에서 다 마실 만큼 미련하셨다니, 나 역시 가끔 미련한 짓을 하곤 한다. 그러다 손해 보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유전자를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해도 그 몫은 나 자신이 것이거늘. 그래. 어려서는 엄마 말 잘 들었으니, 아내 말을 잘 들어야 했는데, 그건 잘 못한 것 같다. 이제는 딸들 말을 잘 들어야 할 터인 듯. 남자는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며. 어려서는 엄마의 말, 결혼하면 아내의 말, 늙으면서는 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