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1- 장례식이 좋았던 이유!

영광도서 0 504

그래, 가끔은 허망한 이야기도 하자. 허망한 본질이 인간의 몫이니까. 누구나 한 번은 오고 한 번은 가는 게 인생이니까.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깊이 있게 생각할 것 없이 그저 단순하게 그 순간의 절실한 것 하나만 생각하고 산다면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으랴.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시절 장례식 풍경이 떠오른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마른자리 갈아뉘고 배고프니 젖을 주어”

어쩌다 마을에 장례식이 생기면 동네 어른들은 모두 장례식 집에 모였다. 비록 삼일장이긴 했지만 그 사이에 어른들은 협동하여 장례식 절차를 진행했다. 장례식이 벌어지면 일단 남자 어른들은 평소에는 물굽이 아래 으슥한 숲에 모셔두었던 장례용 가마 재료를 꺼내어 꽃상여를 조립하였다. 이 곳은 용소로 가는 하천 옆에 있었는데, 평소에도 이곳을 지나노라면 귀산이 나올까 겁이 나기도 했다. 집 자체도 울긋불긋한 오두막 같아서 가까이 가기도 꺼렸다.

꽃상여를 낮에 준비하고, 저녁이면 장례식 집 앞 뜰엔 커다란 황닥불이 피워졌다. 어른들은 불가에 모여 집에 담든 막걸리를 마시면서 밤을 지새웠다. 아이들도 황닥불 가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면 어쩌다 어른들이 하얀 쌀 가래떡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겨울이라면 황닥불에 구운 가래떡을 얻어먹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만큼 먹거리가 귀했으니까. 설날에도 먹을 수 없는 쌀 가래떡은 장례식에서나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래떡을 포함하여 동네 아줌마들의 주도로 우선 장례식 음식을 장만하였다. 부침개며 제수음식이며 장례식에 쓸 음식들을 준비하는가 하면 멀리 장에 가서 제수물품을 사들였다. 물론 평소에 담가두었던 밀주도 한 몫을 했다.

3일 동안이긴 하지만 동네에서는 일이 한 번 벌어지면 동네 모두의 일이었다. 한 집도 예외 없이 그 집에 모여서 그 날들을 보냈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아이들이 장례식에 모여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모이는 건 떡을 받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의 관심을 끄는 건 하얀 가래떡이었다. 다른 때는 구경도 못했으나 장례식에는 하얀 가래떡은 필수였다. 그것도 동네에서 모두 모이기 때문에 제법 많은 양의 떡을 해야 했다. 그 떡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모였는데, 어느 때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떡 분배를 맡은 어른이 똑같은 크기의 가래떡을 나누어주었다.

그럴 때면 작은누나는 나와 작은형을 앞세우고 동생 하나는 업고 장례식 집으로 갔다.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비공식이긴 했으나 밤에 떡을 나누어주는 시간이 대략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쯤에 맞추어 장례식 집으로 가곤 했다. 그렇게 가면 등에 업은 동생 몫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것이 모처럼의 별식이자 좋은 땟거리였다. 물론 가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다. 비록 철이 없고 떡을 받을 수 있어서 가는 것이긴 해도, 슬픔을 느끼지는 못한다 해도, 베옷을 입은 상주들을 모면 왠지 무서웠고, 더구나 집 밖에 시신을 모셔둔 옥수수 섶으로 가린 곳을 지나노라면 귀신이 나올까 싶어 소름이 돋았다. 가래떡을 받으려면 그런 무서움쯤은 이겨야 했다.

장례식 당일이면 꽃상여가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가다가 산으로 올랐다. 울긋불긋한 꽃상여는 아름답다기보다 왠지 무서웠다. 맨 앞에 선 어른이 슬픈 곡조만 슬픈 목소리로 슬픈 가사를 선창하면 상여를 맨 어른들이 후창하면서 지나가면 뜻은 몰라도 슬펐다. 무서웠다.

그래도 아이들은 상여 뒤를 따랐다. 험한 산으로 한참을 올라가도 아이들은 끝까지 따랐다. 다 따르는 것이 아니라 특히 가난한 집 아이들이 따랐다. 물론 우리 형제들은 단골이었다. 산에 올라 시신을 안치하고 무덤을 만드는 과정도 일일이 지켜보았다. 앞서서 묘를 판 어른들이 준비한 묘에 시신이 든 관을 내려놓고 어른들은 흙을 덮었다. 얼마만큼 덮으면 그것을 다지는 어른들이 새끼를 달아맨 막대기를 중심으로 함께 잡고 원을 돌면서 구슬픈 노래를 불렀는데 즉석에서 곡조만 맞춘 것 같았다. “먼데사람 듣기나 좋게, 옆에 사람 보기나 좋게” 하면서 다지기를 하노라면 상주들 중 누군가는 새끼에 지폐를 하나씩 꿰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묘지를 만드는 일을 진행했다.

그 모든 절차가 끝나고 해산할 무렵이면 산에 싸서 가지고 갔던 음식들, 특히 가래떡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걸 받으러 우리 형제들은 그 현장까지 따라가곤 했다. 그만큼 먹을 것이 귀했다. 거의 일 년 내내 딱딱한 옥수수밥이나 먹거나 감자가 주식이었으니, 그런 창피쯤이야 능히 견딜 수 있었다. 더구나 흰 가래떡인데, 그걸 받아다 화롯불에 살짝 구워먹는 맛이야 어디에 비하랴.

어른들에겐 그야 말로 통절한 슬픔이었을 테지만 철모르는 아이들에겐 아주 괜찮은 먹거리를 얻을 수 있는 때였던 장례식, 그래 그런 것 같다. 세상을 많이 알려고도 말고, 그저 철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게 더 행복할 것 같다. 내밀하게 이런 사정 저런 사정 알다 보면 세상 사 대부분은 그저 슬픈 일이 더 많은 듯하다. 어른이 되어 절실히 그런 걸 느낀다. 인생이란 그런 거려니, 누가 떠나든 내가 떠나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 순간 절실한 것만 생각하면서 철없이 살았던 그때 그 마음으로 살았으면 싶다. 하얀 가래떡 하나 받아들고 나서 남의 슬픔일랑 전혀 관심도 없었던, 그저 좋았던 그 순진한 마음으로. 아는 게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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