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4- 야! 우리 엄마 잘 날아간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아니 이른 아침이라 비가 오나 보다. 요즘 보아하니 낮엔 비가 멈춤하고 밤이면 비가 오긴 한다. 장맛비라고 하지만 부드럽게 대지에 스며들 듯싶은 차분한 비가 아침을 적신다. 이런 비가 오면 엄마 비 같아 엄마 생각이 나고, 억수로 퍼붓는 소낙비를 보면 아버지 비 같다. 나의 엄마는 아버지보다 훨씬 무섭고 엄격했고, 반면 나의 아버지는 한없이 부드러워 험한 말씀 한 번 한 적이 없으셨음에도, 왜 부드러운 비는 엄마 비로 억센 비는 아버지로 비유하고 싶은 것일까,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그랬다. 과거, 추억, 지난 일, 그리움, 이런 단어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엄마, 마음에 살아나는 모습 또한 엄마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조금, 엄마에 대한 기억은 항상 많았다.
어렸을 적엔 나뿐 아니라 시골 아이들 모두 학교에만 다니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무엇이든 했다. 가령 토끼풀을 뜯으러 간다든지, 소꼴을 베러 간다든지, 어린 동생을 업어준다든지, 하다못해 저녁 꺼리를 위해 감자를 캐다 까놓는다든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집에 오면 공부대신 부모 일을 덜어야 했다.
더구나 방학이면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밭에 가서 김을 매거나 논에 가서 피를 뽑거나 해야 했다. 어디 놀러가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건 알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방학 때면 늘상 내주는 숙제인 일기쓰기엔 거의 그런 일로 채워졌다. 아니 일기를 쓸 여유도 없었다. 종일 어른들 도와 일하다 보면 저녁이면 잠들기 바빴으니까. 하여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부랴부랴 밤새워 일기를 한꺼번에 써야 했다. 그럴 때면 지어내서 하루하루 간단하게 채우는 것은 별로 신경이 안 쓰였으나 문제는 그날의 날씨였다. 날씨도 대략 지어내서 맑음, 비옴, 비 오다 맑음이거나 맑다가 오후 비옴, 이런 식으로 적당히 채워서 냈다. 한 번도 지적을 받은 적은 없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참 잘했어요.”라는 평가를 받았으니, 선생님이 알고도 속아준 것일지, 아니면 정말 진실로 믿었던 것일지 그건 모르겠다.
이렇게 보내는 방학, 여름방학 어느 날이었다. 우리 소유는 아니었으나 우리 집에서 보면 신작로를 건너 가파른 산 위에 올라앉은 밭, 아버지가 일군 화전에 엄마를 따라 김을 매러 갔다. 비옥한 밭은 아니었다. 곳곳에 바위며 돌들 투성이의 밭이었다. 돌들 사이에 곡식이 자랐고 곡식의 자람을 방해하는 잡초도 함께 자랐다. 그날은 엄마는 나만 데리고 그 밭에 김을 매러 가셨다.
엄마가 하는 대로 제대로 김을 매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두 이랑을 함께 매면서 앞으로 나갈 때 나는 한 이랑을 엄마를 따라 잡초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 호미로 흙을 파서 잡초의 흔적을 지우는 김을 맸다. 순종파인 나는 엄마 말씀을 참 잘 들었다. 그래서인지 꼬맹이 같은 내가 무엇을 알까만 엄마는 김을 매시면서 내게 “나중에 너 장가가면 나는 너네 집에서 살란다." 라고 하셨다. 그때뿐 아니라 나중에, 더 나중에도,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는 내게 그리 말씀하시곤 하셨다. 아무래도 어린 내가 김을 매는 게 서툴긴 했지만 엄마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으시고 차근차근 김매는 법을 가르치시면서 대견해하셨다. 김을 매다가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지 어린 내가 무엇을 알겠다고 살아오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해주시곤 했다.
그러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커다란 왕거미였다. 그런데 왕거미 등에는 수많은 애기 거미들, 좁쌀개미만한 애기거미들이 뭉텅이로 붙어 있었다. 그것을 붙잡아 엄마한테 신기하다는 듯 건넸다. 엄마는 그걸 놓아주시면서 “얘들은 엄마 몸을 파먹으면서 산단다. 엄마를 다 파먹어 껍질만 남으면 여럿이서 엄마를 하늘로 날려 보내면서 야! 우리 엄마 잘 날아간다고 하고는 살아가는 거란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믿었다. 엄마는 진짜처럼 진지하게 말씀하셨으니까. 엄마께서 어디서 들으셨든 엄마도 그렇게 믿었던 듯싶었다. 실제로 그럴 듯했다.
아직 나는 엄마의 그 말씀을 확인한 적은 없다. 그게 실제로 맞는 왕거미의 생리인지 알지는 못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 왕거미나 우리 자식들이나 상징적으로는 맞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나는, 우리들은 엄마의 등골을 조금씩 빼먹으면서 자랐을 테니까.
얼핏 생각하면 다른 집과 달리 엄마는 엄격하고 아버지는 늘 부드러운 이미지로 남았지만, 엄마가 항상 엄격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만 기억해서 그렇지 평소에는 지금 내리는 이 아침의 비처럼 얼마나 부드럽게 마음을 적셨던가.
상투적인 말이지만 엄마는 늘 아버지보다 그립다. 아버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하룻밤 한 순간의 수고로 족했다면, 엄마는 적어도 나를 280여 일을 품어주셨을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은 엄마의 그리움이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보다 더 진한 것 같다. 내 딸들도 그렇겠지. 지금의 나처럼. 엄마의 그 한 마디 비처럼 내 마음을 적신다.
“야! 우리 엄마 잘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