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9- 아플수록 엄마가 그리운 이유

영광도서 0 512

코로나19로 세상이 어지럽다. 자나 깨나 코로나 걱정이다. 집을 나서려면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코로나 전파자 같아 겁난다. 먼 남의 일처럼 느끼다 요즘은 남의 일이 아니라 누구에든 일어날 일, 나라고 예외는 아닐 거란 생각에 두렵다. 이 모두가 문명의 이기요 지나치게 발전한 문명의 영향이다.

 

아는 게 병이라고 예전엔 다른 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들려온다.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 기침 한 번 하면 그 기침에서 튀어나온 침방울이 내게도 튄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세계는 한 덩어리로 뭉쳐 돌아간다. 글로벌이니 지구촌이니 문명의 발전이 오고 감의 속도를 극도로 빠르게 하고, 그 결과로 세계를 한 덩어리로 만든 것까지는 좋았으나 지금처럼 유행성 질병이 나타나면 끔찍한 재난으로 다가온다.

 

이럴 때면 교류가 별로 었던, 교류하고 싶어도 원활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로 오히려 더 돌아가고 싶다. 물론 그때에도 유행성 감기는 있었다. 한 동네에 어떤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어느 집을 막론하고 감기 환자가 유행처럼 번지긴 했다. 그렇다고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특별히 약국에서 약을 지어다 먹지도 않았다. 하긴 약국을 구경할 수도 없었다. 면소재지가 있는 도관리까지 가야 약국 하나 있었으니까. 그저 감기에 걸려 머리에 불이 날 지경이면 엄마가 끓여주시는 질금 가루를 마시고, 엄마가 둘러주시는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곤 누워서 며칠 끙끙 앓다가 용케 일어나곤 했다. 누구에게나 같은 약이었다.

 

어쩌다 눈에 눈병이 생길 때가 있었다. 눈병이 생기면 아이들이 덩달아 눈병에 걸렸다. 그렇다고 그걸로 병원에 갈 일도,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약국은 면소재지에 있었으나 병원은 읍에 가야 했으니, 어린 내겐 병원이 뭔지도 몰랐다. 아이들 모두 그랬다. 때문에 눈병이 생기면 아이들 나름 치료법이 있었다. 속눈썹을 한두 개 뽑았다. 길에다 작은 돌 두 개를 놓고 그 위에 고인돌마냥 돌을 얹어 놓은 다음, 그 위에 뽑은 눈썹을 올려놓았다. 그러면 누군간 그 돌을 건드려 무너뜨리는 사람이 눈병에 걸리는 대신 내 눈병은 낫는다고 믿었다.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속눈썹을 뽑은 때문인지 거짓말처럼 눈병이 나았다.

 

병원에 가지 않고도 약을 먹지 않고도 그렇게 모든 병을 고쳤다. 유행병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무섭지도 않았다. 어떤 병에 걸리든 엄마의 손 하나면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특별한 약은 없었지만 엄마는 우리가 아플 때마다 적당한 처방을 해주셨다. 그 처방 덕분에 며칠 지나면 모든 병은 사라졌다.

 

이빨이 아프면 엄마는 실을 가지고 이빨에 걸어 재빨리 잡아당겨 뽑아주었다. 뽑은 이빨을 종이에 싸서 지붕에 던지게 하셨다. 그걸로 이빨의 통증은 끝이었다.

 

감기에 걸리면 질금 가루와 수건이면 되었고, 따듯한 아랫목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시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음식을 먹다 체하면 소다를 먹게 하셨다. 과학적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소다를 입에 털어놓은 다음, 물을 마시게 하고, 손으로 쓰다듬어주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아픈 게 멈추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머리에 이가 많으면 살충제 디디티를 머리에 온통 하얗게 뿌려주셨다. 옷 솔기에 있는 이들은 엄마는 친히 이빨로 터트려 죽이거나 아이면 등잔불에 지져서 죽이셨다. 약이라곤 5센티미터 가량에 투명 병에 담긴 이약을 발라주시거나 옷 솔기에 발라주시는 것으로 끝이었다.

 

손을 베이거나 몸에 상처가 생겨 피가 나면 엄마는 등유를 뿌리시곤 상처에다 갑오징어 뼈를 긁어 가루를 내어 상처에 뿌린 다음 싸매주셨다. 그렇지 않으면 선인장을 하나 떼어 짓찧어 끈적끈적한 코처럼 만들어 상처에 처매주셨다.

 

엄마는 어떤 병이든지 어떤 상처든지 나름의 처방을 하셨다. 그 모든 처방으로 우리는 병에서 놓였다. 상처는 아물었다. 엄마만 믿으면 두려울 게 없었다. 엄마만 계시면 어떤 아픔이든 어떤 병이든 무섭지 않았다. 적어도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그랬다.

 

아는 게 병이라고 엄마 품에서 벗어나면서 무서운 일, 겁나는 일은 늘어난다. 엄마보다 아는 게 많아지면서 엄마의 처방을 더는 믿지도 않고 더는 이용하지도 않으면서 처방 법은 늘어나는데 세상은 더 힘들게 한다. 어쩌면 엄마 혼자 끝까지 아들 인생을 책임질 수 없어 아내를 대신 짝지어주는 게 삶의 원리일지 몰라도,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아프거나 힘이 들 때면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고 그립다. 무서운 병에 들려도 엄마 손 하나면 한순간이나마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가 계시면 든든한 울타리로 남아 큰 위로가 될 것 같다. 어른을 지나 생전에 계셨을 때의 엄마의 길을 따르면서도, 그럴수록 힘들고 아플 때면 엄마가 그리운 이유, 엄마가 아쉬운 이유를 모르겠다. 단 한 번이라도 엄마 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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