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9- 메뚜기 잡기

영광도서 0 520

과거와 현재, 먼 과거와 현재, 까마득한 오래 전 일들이라도 추억에 잠겨보면 바로 옆에 있는 듯 생생하다. 시간은 그런 것 같다. 멀리 오면 공간은 아주 멀리 까마득한데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기억 속에서 소환하면 지척이다. 그래서 시간의 소환은 즐거운 듯하다. 그때는 비록 힘겨웠어도 지금 소환하면 힘들지 않은 이유, 그것은 시간은 거리를 두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과거는 멀든 가깝든 현재의 나의 곁에 머물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힘들면 과거의 모든 일도 힘들게 다가오고, 지금 내가 즐거우면 힘들었던 과거도 정겨운 추억으로 다가오니까. 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일은 하나 하나 참 즐겁다.

 

나 어렸을 적엔 풀밭 어디에나 메뚜기가 아주 많았다. 묵밭이거나 풀밭엔 어디에나 메뚜기가 많았다. 특히 논두렁에 메뚜기가 많이 뛰어다녔다. 틈만 나면 메뚜기를 잡았다. 구워먹기 위해서였다. 녀석들을 잔뜩 잡아다 화로에 솥뚜껑을 뒤집어 걸고 들기름을 살짝 넣고 볶으면 참 맛이 있었다. 먹을 것이 귀한 때라 괜찮은 먹거리였다.

 

메뚜기를 잡을 때엔 주로 강아지풀을 이용했다. 강아지풀 이삭을 잡아 다니면 쉽게 뽑힌다. 잘 뽑으면 족히 20센티미터는 된다. 메뚜기를 잡을 때마다 메뚜기 등을 살짝 들면 등껍질과 몸 사이에 틈이 생기는데 그 사이로 강아지풀 이삭을 밀어 넣어 앞으로 뺀다. 마치 바느질 할 때 바늘로 옷을 꿰매듯 꿴다.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 꿰면 이내 이삭을 가득 채운 메뚜기 꾸러미를 만들면, 꾸러미가 만들어지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메뚜기를 잡는 데 재미있기도 하여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강아지풀 이삭에 꿰는 게 아니라면 술병을 이용했다. 소주병 중에 4홉들이 병을 사용했다. 강아지풀 이삭을 사용하려면 일일이 꿰어야 하는 불편이 있었으나 병을 이용하면 잡는 족족 담으면 되어 보다 쉬웠다. 메뚜기를 잡을 때마다 병에 담으면 녀석들은 안에서 튀어나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나오지 못했다. 잡힌 메뚜기들이 늘어날수록 녀석들 중 아래 깔린 녀석들은 꼼짝 못했고, 위에 있는 녀석들은 여전히 밖으로 나오려고 통통 거렸다.

 

병을 가득 채우거나 강아지풀 이삭에 꿰어 메뚜기 꾸러미를 여럿 만들거나 메뚜기 잡기는 재미있었다. 통통 튀어 오르며 풀잎 위로 뛰어다니는 메뚜기들을 보면 귀엽기도 했고, 날랜 녀석들을 손바닥으로 낚아채는 재빠름에 재미를 느꼈다. 메뚜기는 풀잎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통통거리면서 이 풀잎 저 풀잎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녀석들이 어디로 튈지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손바닥을 펴고 녀석의 진행방향으로 낚아채면 여지없이 손바닥 안에 갇혔다. 메뚜기 잡기, 친구들과 누가 더 많이 잡나 시합을 하면 더 재미있었다.

 

메뚜기라도 다 먹는 건 아니었다. 먹는 메뚜기는 두 종류밖에 없었다. 보기엔 다 비슷해 보여도 아이들은 딱 보면 먹을 수 있는 메뚜기와 먹을 수 없는 메뚜기를 구분했다. 물론 먹을 수 있는 메뚜기가 가장 많이 뛰어 다녔다. 여치라든가 베짱이는 드물었다. 그런 것들은 잡지 않았다. 가장 흔한 메뚜기 외에 다른 한 종류는 사마귀처럼 생겼으나 사마귀보다는 훨씬 작고 사마귀는 징그러운 데 비해 작고 귀여운 메뚜기가 있었다. 보통 메뚜기는 단순했으나 이 메뚜기는 마치 초록 치마를 입은 모양이라, 일반 메뚜기는 남자, 요렇게 생긴 메뚜기를 여자 메뚜기로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른들이 없어도 작은형이 메뚜기 요리는 아주 잘했다. 화롯불에 구멍쇠를 얹고 그 위에 솥뚜껑을 뒤집어 얹었다. 솥뚜껑은 뒤집으면 약간 움푹한 것이 메뚜기 튀기기에 딱 좋았다. 들기름을 살짝 붓고 소금을 조금 뿌려서 들들 볶으면 메뚜기들은 이내 초록에서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조금 식으면 아삭아삭한 것이 과자처럼 맛이 있었다. 메뚜기는 주식은 아이었지만 아이들에겐 참 좋은 간식이자 과자가 귀한 시대에 과자 대용물이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메뚜기 튀김, 지금은 거의 맛볼 수 없다. 물론 그것들도 소중한 생명이다만 생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그렇다고 그때의 잔인함을 나는 참회하거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기준과 그때의 기준은 다르니까. 오히려 그럴 기회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때처럼 메뚜기를 잡고 싶다. 병에도 담아보고 강아지풀 이삭을 뽑아 메뚜기 꾸러미도 만들어보고 싶다. 겉으로는 순하게 생겼다만 그런 마음이 여전히 남은 걸 보면 내 안엔 역시 잔인한 짐승 같은 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립다. 함께 메뚜기 잡던 또래 친구들, 지금은 어디선가 나처럼 늙어갈 친구들, 더 나이 들기 전에 한 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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