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8- 시제를 차려주어야 하는 아버지 신세

영광도서 0 537

“삶이 그대를 속이드래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지나니.”라고 푸쉬킨은 읊었다만 실제 삶의 여정은 그리 녹녹치 않다. 가난한 이들의 터널은 언제 어디서 끝날지 모르게 캄캄하다. 그럼에도 언젠가 끝이 있겠지, 푸싀킨의 시가 사실이라 믿으며 희망고문으로 터널 안을 묵묵히 걷는다. 그렇게 삶에 속아 산다. 그게 인생이라면 인생일 것이다.

 

우리 집이 그러했다. 이사를 왔으나 우리가 경작할 땅은 턱없이 부족했다. 식구는 여럿인데 밭이라곤 천 평도 채 되지 않았다. 하여 아버지는 원래 살던 곳에서 백우산 쪽으로 오르면 있는 다랑논 일곱 마지기를 얻었다. 아버지의 외가 쪽으로 아버지의 손자뻘, 손가락이 여섯이라서 육손이란 별명을 가진 황씨, 그 집의 시제를 차려주는 조건이었다.

 

집은 우렁골이었으나 실제로 아버지와 엄마는 광암리 가족동 다락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엄마와 아버지는 논에 일하러 가셔야 했고, 나와 작은형 역시 따라나서야 했다. 그렇게 참으로 오랜만에 논농사를 할 수 있었다. 논농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일 년 내내는 아니라도 전보다는 가끔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다랑논이라 논두렁이 낮은 것은 1미터, 높은 논두렁은 3미터를 넘기도 했다. 논두렁은 높은 데다 논바닥은 작은 것은 한 평짜리에서부터 큰 논이라야 50평밖에 되지 않았으니, 일곱 마지기에 50배미는 족히 되었다. 하여 소를 이용하여 갈고 삶을 수 있는 논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소를 이용하지 못하고 손수 괭이와 쇠스랑으로 다뤄야 할 논도 꽤 많았다.

 

그럼에도 봄이 깊어 벼들이 빈 공간을 서서히 메워 논바닥이 잘 안 보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았고, 여름이 되어 논두렁 위로 초록색 벼들이 넘실거리는 것을 멀리서 보면 기분이 좋았다. 물론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내려 논두렁이 터지면 워낙 논두렁이 높은지라 뒤에서부터 앞에까지 논바닥을 덮어버리면 그렇게 애써 키운 벼들이 묻혀 흙더미만 남으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 못하고 흙을 걷어내고 벼를 살려내느라 애썼다.

 

질곡의 시절을 지나고 벼들은 이삭을 내고, 꽃을 피우고, 가을이 오면서 벼이삭들이 다랑논 두렁 위로 고개를 숙이며 누론 빛을 띄기 시작하면 그렇게 대견할 수 없었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다랑논들이라 논두렁들이 그림처럼 이어졌고 논두렁 위로 고개를 내민 누런 벼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출했다.

 

농사를 짓는 기쁨, 특히 논농사를 지으며 얻는 기쁨은 벼들이 단순히 식물이 아니라 잘 자라는 자식과 같아서 과정마다 보람을 느끼지만 가을이면 황금빛 대견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이었으리라. 그런 기쁨을 얻는 대신 걱정이 따랐다. 다름 아닌 시제를 지내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전에는 시제에 따라가서 맛있는 음식을 얻는 즐거움이었다면 이젠 우리가 그런 음식을 준비하는 입장이었다.

 

그해 아버지는 시제를 차려주기 위해 일단 돈을 빌어야 했다. 시제를 차리기 위해서는 다부지게 장을 봐야하기 때문이었다. 시제에 올릴 고등어며 색동저고리처럼 알록달록한 사탕이며, 집에서 준비할 수 없는 제수음식을 구입해야 했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집에서 준비할 것도 많았다. 미리 술을 담가야 했으니 엄마는 옥수수 술을 미리 담갔다. 옥수수 술이라면 막걸리였으나 거르기 전에 맑은 술을 따로 떠서 준비를 해야 했다. 그 외에도 엿을 고아서 엿이 되기 전 단계에 조청을 만들어야 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쫀득쫀득한 약과를 만들 때에도 조청이 쓰였고, 다식을 만들 때 반죽에 조청이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집에서도 약과니 다식이니 괴질이니 이런 것들을 만들어야 함은 물론 그 외에도 시루떡이며 부침개며 여러 음식을 준비하려니 제법 많은 수고가 들어야 했다. 그걸 엄마는 무난히 해내셨다. 수고도 수고려니와 소용되는 돈도 많이 들어야 했다. 그것이 도조 대신이었으니까.

 

시제 날,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준비한 제수 음식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지게에 짊어지고 시제 장소인 산소로 향했다. 산소는 광암리 가족동 백우산 중턱에 있었으니 제법 멀었다. 광이라 넘나들 때 다니던 길을 따라 고개를 넘은 후 백우산 발치를 따라 이어진 길로 다락터 입구에 이르렀다. 여기서 산으로 접어들어 백우산 속으로 한참 올라야 했다. 중턱에 황씨네 산소가 있었다.

 

돈은 많이 들었으나 모처럼 멋있는 음식을 접할 수 있어 좋긴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잘 차렸다고 칭찬이 자자했으나 시제 주인 황씨, 우리에겐 “아재”라고 부르면서 깍듯하게 대하면서도 제수 음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아버지에게 투덜거리면서 불평했다. 그걸 애써 참은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내가 좀 더 커서 힘만 있다면 한방 줘 먹이고 싶을 만큼 깐죽대는 모습이 거슬렸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내년엔 내놓아야겠다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형평이란 걸 아버지는 모르시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년에도 그렇게 시제를 차려주어야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니까. 남의 시제에 음식을 얻으러 다닐 때가 바로 전해였는데, 우리 집이 당사자가 되고 나니까 마음이 달라도 아주 달랐다. 공연히 긴장되었다. 순간순간 걱정이었다. 조카뻘이라는 황씨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남의 시제를 차려준다는 것,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 조상 모시는 것보다 더 많은 수고와 정성은 물론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그게 세상사는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친척이고 뭐고 사람과의 관계에선 어디든 어느 때든 갑과 을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린 내 마음도 그리 기분이 안 좋았는데, 아버지는 얼마나 기분이 상했을까? 가난이라는 설움, 가난이 서럽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부자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어쩌면 하룻밤 술값이 누군가에겐 두서너 달 생활비가 될 수 있으니, 더불어 산다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 같다.

 

지금, 나는 그런 대로 살만하다. 사람은 간사한지라 그때의 그 아픔은 남의 일 같다. 그때 우리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 희망고문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 얼마든 있으리란 걸 모르지 않으면서 그들을 염려하는, 그들을 생각하는 때는 아주 드물다. 삶에 찌든 게 아니라 오욕에 찌든 것 같다. 다른 이들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더는 다가오지 않으니, 이 아침 내가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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