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1- 엄마가 겪은 끔찍한 수모의 기억

영광도서 0 507

지난 일을 돌아보면 즐거웠던 일, 행복했던 일, 잘했던 일보다는 슬프고 힘겹고 곤란했던 일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우리 기억 구조가 긍정적인 일들을 기억하기보다 힘든 일을 더 기억을 잘하게끔, 좋은 일들은 망각하고 그렇지 않은 일들은 망각하지 못하게끔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기억하면 좋을 일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중충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기억이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텐데, 이러한 그늘이 내 안에 드리웠을 생각을 하면 내 안에 부정적 요인들이 많겠다 싶다. 하여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이 좋다.

 

누나는 그 일 이후로 할아버지 형님댁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누나가 혼사를 거부하자 엄마는 누나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 결혼을 없던 일로 하기로 통보했다. 우리 집에 남은 패물단지가 문제였다. 그 집에서 파혼한다고 해도 패물단지를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니 패물 값을 물어내라는 거였다. 무려 48,000원, 우리가 살던 집을 31,000원에 팔고 온 것을 생각하면 그때는 나는 물론 세상물정을 몰랐지만 적지 않은 돈임엔 틀림없었다. 그걸 물어줄 능력이 없던 우리 집에선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는데, 그때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장남인지라, 큰매형이 큰형을 서울에서 불러 내리기로 했다.

 

전화조차 없던 시절이라 빨리 연락을 하는 방법은 전부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공부 중이었던 큰형에게 매형이 ‘부친위독급매’ 즉 ‘부친이 위독하니 급히 내려올 것 매부’ 란 내용이었다. 전보를 받은 큰형이 다음날 급히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는 누나의 혼사문제였다는 것을 안 큰형은 화를 내고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냉정하게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로 가버렸다.

 

이번엔 엄마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광암리에 고모사촌형들을 불러 의견을 나누려는 거였다. 하여 밤에 작은형과 나는 사촌형들에게 집으로 모일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딱히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여든 사촌형들은 누나를 불러 고작 설득하여 혼사를 잇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누나는 그 사람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선언하고는 광암리 친구 집으로 피신하고 말았다.

 

엄마는 손해배상을 물고 파혼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에게 읍에 사는 수양고모에게 부탁하여 패물을 처분하게 부탁하라고 했다. 아버지가 읍으로 가서 수양고모에게 부탁하여 패물을 처분한 결과 물어내야 할 돈의 절반인 23,000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 돈에 이웃에서 돈을 빌려 패물 값을 물어주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된 듯했다.

 

그런데 그 집의 아주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집에서 행패를 부리곤 했다. 누나는 겁이 나서 집에 오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그들이 올 때면 재빨리 뒷산으로 도망을 쳐서 숨곤 했다. 하루는 아들을 대동하고 온 그 아주머니가 엄마를 방에서 머리채를 끌고 마당으로 나와서 엄마를 괴롭혔다. 엄마는 죄인이라도 된 양 반항하지 않고 그 수모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방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지만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숨어 있던 나와 작은형은 고스란히 그 장면을 지켜만 보았다.

 

그런 우리 사정을 안 사돈총각이랑 동네청년들이 나서서 그 아들을 붙잡아 혼을 내주고 다시는 우리 동네에 얼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나서야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무척 부끄러웠다. 작은형은 열일곱 살, 나는 열네 살, 동생은 아홉 살, 막내동생은 여섯 살, 넷이서 엄마가 그런 끔찍한 수모를 겪는 것을 그냥 내려다보고만 있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팠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에 떠오른다. 그렇게까지 당할 이유가 없는데 무지한 고로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던 엄마, 파혼한 우리 잘못이니 그대로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엄마, 그때 엄마의 심정이 얼마나 시렸을까? 그것보다 지금 생각해도 열네 살이면 그렇게 적은 나이가 아닌데 엄마가 그런 수모를 당하는 데도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던 나, 왜 그랬는지, 늘 엄마에게 미안했고, 지금도 그때 용기 없던, 아니 무지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무지와 용기 없음은 큰 죄다. 나는 그때 정말 바보천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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