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6-깜짝 서울!

영광도서 0 515

사람은 때로 우연인 것도 같고 숙명인 것도 같다. 의당 내 삶은 이렇게 흐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크게 이 두 가지 생각이 어떤 것이 맞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세상에 단순한 우연은 없는 것 같다. 그런 우연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 같다.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라면 조연도 있고 엑스트라도 있듯이, 그저 일순간 스쳐 지나는 우연한 사람들도 있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우연을 인연으로 바꿔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아버지가 애써 마련한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우리 집, 기억자 형으로 긴 사랑방 하나에 큰가마 달리 부엌, 윗방과 아랫방이 연이어 붙어 있고 아랫방 뒤에 본 부엌, 부엌에 딸린 마굿간, 동생들 둘, 엄마, 아버지 그리고 나, 다섯이 살기엔 충분했다. 사랑방은 간이로 벽을 만들어 아래쪽엔 내가 지냈고, 위쪽엔 동생이 지냈다.

 

비교적 편안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큰형이 서울에서 갑자기 내려왔다. 나를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서울에 데려다 공부를 시켜주겠다니, 아버지는 못내 서운해하셨지만 엄마는 내가 언젠가는 꼭 공부로 성공하기를 바라셨기에 기꺼이 보내주시기로 했다. 나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내가 서울 가면 집에 일할 사람은 엄마와 아버지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서울을 동경한 적이 없었다. 그냥 익숙한 삶이 좋았다. 그럼에도 순종 잘하는 나는 큰형을 따라 다음날 서울로 향했다.

 

당시 서울에 가려면 마장동 버스정류장을 이용했는데, 마장동에서도 다시 버스를 바꿔 타고 도착한 곳이 정릉2동이었다. 큰형은 단층짜리 단독주택에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고 있었다. 기억자 형에 가운데 마당이 있고, 마당 한가운데 폄프가 있는 집이었다. 주인은 그때 제법 유명했던 탈렌트 K였다. 그 분의 남편은 방송작가였는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분의 어머니 역시 혼자 몸이었으니 어머니도 혼자, 주인도 혼자, 그리고 어린 딸들 둘이 있는 집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집에 살 것은 아니었다. 아침, 점심, 저녁만 형 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올라가는 날 나는 바로 내가 일해야 할 곳으로 가야 했다. 학교로 간 것이 아니라 취직을 시켜준 것이었다. 정릉천이 그대로 흘렀던 시절, 정릉천을 따라 대로로 나오면 미도극장이 우측에 있었고 다리를 건너면 주택은행이 있었다. 바로 주택은행 옆 건물이 내가 근무할 곳, 스피드 타자 주산 부기 경리학원이었다. 이 곳에서 잠을 자고 일하고 식사만 큰형 집에 가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 달 월급 12,000원이었다.

 

하는 일은 일단 아침에 다섯 시에 기상, 3개 층에 해당하는 고실들 정리정돈 해놓고 셔터를 다섯 시 반에 열기, 낮에는 선생들 심부름하기 또는 복도와 계단 청소하기, 수업이 모두 종료되면 교실 청소하기, 이 모두를 나 혼자 하는 거였다. 보통 열시에 수업이 종료되니까 청소를 해 놓고 잠자리에 들려면 열한 시는 족히 넘어야 할 터였다. 그 다음엔 잠은 학원 3층 복도에 장의자에 누워서 자면 되었다.

 

첫날은 저녁때 출근했으니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청소하는 일부터 나의 몫이었다. 일단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마대자루 달린 마포로 바닥을 물청소하고 잠자리에 들려니 열한 시가 넘었다. 그제야 장의자에 누울 수 있었다. 시골에선 온 방을 굴러다니며 잤는데, 장의자에서 자려니 굴러 떨어질까 걱정되긴 했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든 적응하기 마련이니 어떻게든 잘 수 있겠지 싶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불 꺼진 교실들, 밖에서 비쳐오는 불빛으로 아주 어둡지는 않았지만 큰 교실을 마주보며 잠을 자려니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잠은 오지 않고 온갖 고향에서의 일들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열두 시가 되면 통행금지라 조용할 줄 알았는데, 도로에서 들려오는 차량들의 소음은 더하면 더했지 소음이 줄지 않았다. 다만 작은 차들만 운행을 금지했을 뿐 엄청 큰 차들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기에 더 시끄러웠다. 그렇게 처음 온 서울에서의 첫날밤은 잠 한 숨 못 자고 보내야 했다.

 

잠버릇이 고약하다고 엄마한테 늘 말을 듣곤 했는데, 사람은 어느 환경이든 적응하는 동물인지라 그날부터 나는 잠버릇을 깨끗이 고칠 수 있었다. 그것이 첫 서울행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제법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 그 일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도 첫 경험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때 그 일들이 내게,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르겠다만 지금도 그곳을 지나노라면 그때 그 일들이 생생하다. 하필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시내로 들어갈 때면 이 길을 반드시 지난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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